“쌍둥이 언니를 찾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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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산가족이 헤어진 친지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데요. 최근에도 이산가족은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탈북 과정에서 이산의 아픔을 겪는 탈북자들이 대표적입니다. 이 가운데 한 탈북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을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지난 2011년 말 한국에 들어온 탈북 청년 박영아(26) 씨는 탈북 과정에서 헤어진 일란성 쌍둥이 언니 박은아(26) 씨를 찾고 있습니다. 북송됐다가 교화소에서 풀려난 언니의 소식은 “강물에 떠내려가서 죽은 것 같다”는 전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영아 씨는 이 소식을 들은 2012년 4월부터 현재까지 언니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영아 씨는 “은아가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언니의 도강을 도운 브로커의 지인이 전해준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니의 행방을 찾기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브로커만이 행방을 아는데 이 사람이 현재 중국 공안에 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박영아 씨: 만약 (그 브로커가) 감방에서 나오면 어머니가 직접가서 물어보고 은아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해요. 그런데 너무 답답한 게 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는 거에요. 언니가 살아있다고 하니까 믿고 싶어요. 혹시 살아있지 않을까.

영아 씨 자매와 그 어머니는 지난 2006년 탈북했습니다. 영아 씨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중국인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쌍둥이 자매는 이 중국인에게 잠시 얹혀 살았지만 곧 쫓겨났습니다. 자매는 생계를 잇기 위해 여러 식당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먹을거리와 잠자리만 제공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선양시의 한 대형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꽃제비와 다름없이 생활했습니다. 16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박영아 씨: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습니다. 잠자리는 지하 3층 냉동고가 있는 곳이었어요. 천장이랑 바닥 대부분이 얼음이었습니다. 침대도 없고 이불도 안주더라고요. 볏짚같은 것을 깔고 잤는데 너무 추워서 잠을 못잤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먹을거리를 꺼내 먹어야 했습니다. 세안은 주방에서 해결했습니다. 또래 중국 친구의 배려 덕분에 보름에 한 번정도는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국 생활을 하던 중 언니 은아 씨가 2008년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고 이 소식을 들은 은아 씨의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중국인 남편도 어머니를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박영아 씨: 언니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저도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이후 영아 씨는 막노동을 하며 어머니를 보살폈고 2011년 한국으로 입국했습니다. 박영아 씨는 “아직 언니가 살아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면서 “남한에서 돈을 벌어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다시 모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함경북도 요덕 출신의 박영아 씨는 현재 경기도 군포시 금정역 인근에서 여성들의 외모를 전문적으로 꾸며주는 가게를 6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