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남한에도 '김정일'이나 '김정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필 북한의 지도자와 이름이 똑같은 건데요. 이렇게 되면 북한에선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하지요. 남한에선 어떨까요? 박성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4일 서울의 어느 행사장. 탈북자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사회자가 행사를 시작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더니 농담을 건넵니다.
김정일 아나운서: 아마 제 이름을 공개하면, 대부분의 분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시겠습니다만, 우리 하나원생들이나 탈북주민들께서는 깜짝 놀라실겁니다. 몸서리가 쳐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 이 뜻깊은 행사의 사회를 맡은 SBS 아나운서팀의 김정일 아나운서입니다.
하필이면 이름이 '김정일'인 사회자는 남한의 방송사 중 하나인 SBS에서 아나운서, 즉 방송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개회사나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김정일'이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화제가 됩니다. 하필 탈북자가 대거 참석한 행사라서 더 그렇습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사회 보시는 분이 김정일 선생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평양에 갔을 때 김정일 그 분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분 보다 훨씬 잘 생기셨네요.
정옥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오늘 사회자 선생님 성함이 하필이면 김정일 선생님이시라, 저도 참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이날 행사는 남한 사회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자신의 좌충우돌 경험담을 이제 막 입국한 탈북자들에게 들려주는 자리였습니다.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겪게되는 대표적인 고충 중 하나가 언어 소통이라는 말이 나오자 김정일 아나운서는 방송 전문가의 입장에서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김정일 아나운서: 남한에 와서 처음 만나는 단어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발음하기 어려울 땐,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천천히 하시면 됩니다. 빨리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에게 '익숙한 듯 보이게 말해야지' 이런 마음을 갖고 빨리 하려다 보니까 전달이 잘 안 돼요.
김정일 아나운서의 탈북자들을 향한 이야기에는 애정이 넘칩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정일 아나운서: 관심이 많습니다. 저 역시 실향민 2세고요. 아버지가 북한에서 오신 분이라서요. 또 제가 대학원에서 북한 정치를 전공했습니다. 관심이 많아서, 행사의 사회 여부를 떠나서, 어떤 형태로든 탈북 청년들이나 탈북 주민에 대한 강연이나 강의 등을 통해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정일 아나운서는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북한학을 전공했습니다. 이날 행사도 대학원 후배의 부탁으로 사회를 맡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이름 석자가 자주 화제가 된 것과 관련해 김정일 아나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분위깁니다. 이런 식의 관심이 낯설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은 "아직까지는 한 번도 없다"고 말합니다.
김정일 아나운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제 이름에 대해서)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다른 분들이 (제 이름을) 기억을 잘 해주셔서 어찌보면 득이 되는 측면도 있죠.
하지만 북한에서는 지도자와 이름이 같으면 큰 손해를 봅니다. 이름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김 씨가 아니더라도 이름이 '정은'이면 개명해야 한다고 탈북자들은 말합니다. "친구나 아이에게 '정은아'라고 불렀다간 큰 일 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름도 함부로 쓸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김정일 아나운서는 북한 바깥 세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김 아나운서는 북한학 전공자 답게 "북한의 유일지도체계가 갖는 특징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합니다.
김정일 아나운서: 저의 입장에서 볼 땐 대단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리고 놀라운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그쪽에선 과연 그에 대한 불만 세력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조금 둔감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2011년 1월 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비준과업'이란 문건을 하달해 '김정은'이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남한 언론들이 이달 초 보도한 바 있습니다.
1960년대에도 북측은 김일성 주석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과정에서 주민들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우도 1970년대 김 주석의 후계자가 된 이후 '정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개명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는 이른바 '최고 존엄'에 대한 북한식 우상화 방법이라고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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