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쿠바 위기 후 핵 개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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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 쿠바 미사일 위기 문제를 처리하는 구 소련 정부에 대한 불신감에서 시작된 북한의 핵 무기 개발과 계속된 군비 지출로 북한 경제가 하향 곡선을 달리게 됐다는 사실이 북한과 구 공산권 국가들 간의 외교문서를 통해 최근 드러났습니다. 양희정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1962년 10월 미국과 구 소련을 핵 전쟁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13일 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에서 북한의 핵 무기 개발 등 자위정책(Self-Reliance in National Defense)이 비롯된 것이라는 외교 문서 내용이 최근 미국 워싱턴의 민간연구단체 우드로 윌슨 센터(Woodrow Wilson Center)에 의해 공개됐습니다.

이 단체에서 북한 국제문서화 작업(NKIDP)을 담당한 제임스 퍼슨(James Person) 연구원은 25일 최근 번역이 완료된 1960년 대 초반 북한과 구 소련, 중국 등과의 외교문서(e-dossier #12: The Cuban Missile Crisis and the Origins of North Korea’s Policy of Self-Reliance in National Defense)를 토대로 이 같이 밝혔습니다.

퍼슨 연구원 : 1962년 10월 구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거하는 것을 본 북한은 "소련은 쿠바나 북한과 같은 작은 주변 공산국가를 방어해 주겠다는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 소련이 북한과 체결한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a Treaty of Friendship, Cooperation and Mutual Assistance)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슨 연구원은 이날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회견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북한은 구 소련과 중국 두 나라와 각각 우호협력 및 상호 원조조약을 맺었지만 이러한 조약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바 ‘자위’ 정책을 공식적으로 취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구 소련은 미국과 화해하기 위해 힘이 약한 동맹국을 쉽게 저버렸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란 미국과 구 소련이 핵군비 경쟁을 벌이던 1960년대 냉전시대에 구 소련이 미국과 지척인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고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를 해상 봉쇄하기로 결정하고 구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에게 쿠바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에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미사일기지를 철거한 것입니다.

퍼슨 연구원은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1962년 11월 김일성 국가주석은 구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했다고 말했습니다.

퍼슨 연구원 : 북한주재 소련 대사의 중재로 소련에 간 북한 대표단은 1억 루블에 달하는 미그기와 지대공 미사일 포대(surface-to-air missile batteries) 등 미국의 공습에 대항할 군사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구 소련은 무상원조를 거부했습니다.

퍼슨 연구원은 1962년 12월에 열린 북한의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중공업산업을 계속 발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주국방을 위한 군비증강도 추구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이 때부터 구 소련, 동독 등에 핵 무기 개발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나라는 중국과 가까운 북한이 중국에 핵 무기 관련 기술을 이전할까 우려해 북한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안보에 불안을 느낀 북한은 수 십년 간 끝없는 군사력 증강 야욕을 추구하며 경제 파탄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퍼슨 연구원은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