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것은 첫 실험이 2006년 10월9일, 두 번째가 2009년 5월25일, 그리고 3차 핵실험은 지난 2013년 2월12일이었고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그 동안 북한이 걸어 온 핵 개발 과정을 이장균 기자와 함께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번 4차 핵실험은 북한 측 주장대로라면 수소폭탄이라는 점에서 그 동안의 핵실험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이장균 : 그렇습니다. 북한이 1월 6일 핵무기 실험에서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수소폭탄은 그 위력과 만드는 방식에서 원자폭탄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핵폭탄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증폭핵분열탄을 모두 지칭하지만 일반적으로 모두 원자폭탄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소폭탄은 원자폭탄보다 수십 배에서 수백 배 강한 위력을 갖고 있어서 수소폭탄에서 발생한 열은 폭발지점에서 100만도에 달하고 적어도 수 Km 밖까지 800도의 고온 열 폭풍을 뿜어낸다고 합니다.
원자폭탄은 우라늄이나 플로토늄의 핵분열을 이용한 폭탄입니다만 수소폭탄은 수소의 핵융합과정을 이용하는 폭탄으로 기술적으로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지 3-4년 지나야 제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 7년 만에, 옛 소련은 6년 만에, 중국은 3년 만에 각각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는데요, 현재까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국가, 그러니까 수소폭탄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 나라입니다.
앵커 : 그렇군요, 북한의 첫 번째 두 번째 핵실험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에 진행됐고 3차와 이번 4차 실험은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이후 이뤄졌는데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1993년 3월12일 NPT, 즉 핵무기비확산조약의 탈퇴선언이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장균 : 그렇습니다. 핵무기비확산조약을 탈퇴한 북한은 여세를 몰아 2002년 12월12일 핵동결 해제를 발표했고 2005년 2월10일 핵무기보유를 선언하고 이듬해 2006년 10월9일 오전 10시30분께 풍계리 지하에서 처음으로 플루토늄 방식의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4월 북한은 국제적인 비난여론을 무릅쓰고 ‘은하 2호 장거리로켓’을 시험 발사함으로서 핵무기를 장착한 장거리 미사일 공격의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1차 핵실험 후에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북한은 2007년 7월15일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고 같은 해 10월3일 6자회담에서 핵시설 불능화를 비롯한 핵프로그램 신고에 합의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2008년 6월27일에는 영변원자로 냉각탑을 폭파까지 하면서 한동안 유화책을 구사했습니다.
앵커 : 네, 당시 냉각탑을 폭파할 때는 외신기자들을 불러 전 세계에 보도하도록 하면서 대외선전에 열을 올리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만 그러나 몇 달 되지 않아 북한은 영변원자로 봉인을 해제하면서 이듬해 장거리 미사일 발사 그리고 두 번째 핵실험까지 감행하게 되죠?
이장균 : 그렇습니다. 2009년 4월5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대북제재가 가해지자 북한은 이에 반발하면서 한달 여 뒤인 5월25일 제2차 핵실험을 감행하게 됩니다.
2차 핵실험은 플루토늄 원자핵분열을 일으킨 본격적인 핵무기 실험으로 발전했는데요, 폭발력도 더 커졌습니다. 1차 핵실험의 폭발력이 1킬로톤, 그러니까 TNT 폭약 1천톤의 폭발력인데 비해 2차 핵실험은 2킬로톤에서 6킬로톤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2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2012년에 ‘은하 3호 장거리로켓 발사 실험’ 등 지속적인 장거리 로켓 실험을 하는데요, 이것은 핵무기로 장거리 타격을 할 수 있다는 걸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겠죠.
앵커 : 북한의 3차 핵실험은 2013년에 있었습니다만 당시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행됐었죠?
이장균 : 네, 2013년 2월 12일 북한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2차 실험 때와 같은 장소인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에서 3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3차 실험 두 달 전인 2012년 12월12일 발사한 장거리 미사일에 대해 유엔안보리가 대북제제 결의안을 채택하자 이에 반발하는 양상으로 강력한 도발에 나선 것인데요, 폭발력은 2차 핵실험보다 한층 강해진 6~16킬로톤으로 추정됐습니다.
특히 3차 핵실험은 고농축 우라늄이 사용된 것으로 보여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라늄은 플루토늄과 폭발력 자체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다량 생산이 쉽고 은밀하게 제조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앵커 : 그로부터 2년11개월 만이죠, 6일에 있었던 이번 4차 핵실험, 북측은 수소탄실험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4차 핵실험이 앞서 이뤄진 3차 까지의 핵실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점입니까?
이장균 : 우선은 이번 실험이 앞서 3차까지의 핵실험과 달리 수소폭탄실험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직까지는 북한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단계입니다. 오히려 한국 군당국은 폭발규모로 봐서 도저히 수소폭탄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또 하나 과거와 다른 점은 북한이 1, 2, 3차 핵실험을 할 때는 사전에 주변 주요국들에게 통보를 했지만 이번에는 중국이나 러시아, 주변국들에 사전통보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점입니다.
앵커 : 북한은 지금까지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2013년 모두 3번의 지하 핵실험을 진행했는데요, 이번까지 북한이 네 차례 핵실험을 진행한 풍계리는 어떤 곳인가요?
이장균 : 네, 풍계리는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에 속한 곳으로 함경남도와 북도의 경계 부근에 있는데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내륙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핵실험장은 윗 쪽의 동쪽 갱도와 서쪽 갱도 아랫 쪽에 아직 남쪽 갱도로 구성돼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현재 갱도가 몇 개 더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고 모두 높은 산을 수평으로 파고 들어가는 형태로 돼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지휘센터와 벙커 등을 갖춘 핵실험 관련 시설이 모여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앵커 : 그렇다면 북한이 핵실험장 부지로 풍계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장균 : 네, 핵실험장 주변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외부 감시를 피하기 좋은 조건이라는 거죠. 또, 암반이 단단한 화강암으로 돼 있어 방사성 물질 유출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수평으로 산을 파고드는 갱도를 만든 것도 산악 지형을 활용하면서 핵실험 준비 작업을 최대한 은폐하기 위한 방안으로 분석됩니다.
앵커 : 북한이 4차 핵 실험 성공 주장과 관련해 이번에도 국제사회가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를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북한은 20년 넘게 국제사회로부터 강도 높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강행해왔지 않습니까? 그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많습니다만 그 동안 북한의 3차 핵실험까지의 국제사회의 제재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정리해 주시죠.
이장균 : 네, 2006년 10월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플루토늄 방식을 이용한 제1차 핵실험 강행에 국제사회는 일제히 북한에 강력 규탄의사를 밝히고 대북제재 이행과 제재위원회의 구성을 결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 제 1718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1718호는 북한의 핵·대량살상무기를 비롯한 탄도미사일 개발을 금지하고, 관련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국가들의 자금과 기타 금융자산, 경제적 자원 동결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2009년 5월 한층 폭발력이 증가한 북한의 2차 핵실험이 있자 유엔 안보리는 대북 제재결의 1874호를 채택했는데요, 여기에는 이전 대북재제 결의안을 상기시키고 무기금수와 수출통제, 화물검색, 금융·경제제재 등의 안을 담겨 있습니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때는 핵실험 23일만에 대북재제 결의 2094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2094호는 핵·탄도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북한의 금융거래를 금지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또 북한 외교관들이 국제사회의 감시대상에 포함됐고 항공기를 이용한 불법화물 검색과 단속조치도 처음으로 시행됐습니다. 아울러 북한에서 무기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품목에 대해서수출입 거래를 하지 말도록 촉구한 조항도 권고에서 의무사항으로 변경됐습니다.
북한의 거듭되는 핵실험에 대해 국제사회, 특히 유엔의 대북제재에 대한 실효성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북한에게는 타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북재제가 강화되는 만큼 국제사회의 인도적 대북지원도 장기적으로 감소했는데요, 2000년대 초반 2억∼3억 달러를 넘나들던 대북지원액은 점진적으로 감소해 2014년에는 2000만 달러에 그친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 네, 지금까지 4차까지 이어온 북한의 핵실험과 관련한 그 동안의 과정을 이장균 기자와 함께 정리해 봤습니다. 이장균 기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