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지난겨울까지 전기를 볼 수 없던 산골에선 김정은 위원장이 누군지 몰라도 장성택의 이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탈북자의 말입니다.
그만큼 북쪽에선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 간부이자 김일성 주석의 유일한 사위, 거듭된 혁명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선 오뚝이 인생이지만 결국은 총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장성택은 누구인가, 서울에서 문성휘, 이현주 기자가 정리해봅니다.
강원도 천내 출신인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1972년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와 결혼하면 정치 인생을 시작합니다.
남녀 사이의 연애 문제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북한 사회에서 김일성의 딸인 김경희와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장성택. 이 둘의 결혼 얘기는 인민들 속에서 아직도 큰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원산 대학을 다니던 평남 문덕 출신 김정순 선생의 말입니다.
김정순: 아마 여느 사람이 그렇게 했으면 부화건으로 큰 변나죠. 사장 투쟁 대상이 되죠...장성택이가 김일성 종합 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다가 김경희랑 연애 사건 때문에 원산으로 내려왔단 말입니다. 원산으로 내려오니까 그 다음부터는 김경희가 계속 차를 몰고 올라와요. 먹을 것도 숱해 싸왔대요. 그 대학 주변에서는 그래서 얘기가 진짜 많았어요. 젊었을 땐 진짜 잘생겼었고...
장성택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9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해 평양시당 지도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72년 결혼 이후엔 당 중앙 위원회 지도원에서 청소년사업부 부장, 당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 부장으로 승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유일한 사위라는 후광에도 장성택의 정치 역정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남쪽에 알려진 그의 혁명화 전력은 2번, 북한 간부 사이에서 전해지는 건 4번이나 됩니다.
78년 측근들과 초대소에서 매주 연회를 벌이다 천리마 제강소로 쫓겨났고, 80년대 중반에는 술자리를 벌이다 돼지목장으로 보내졌습니다. 2002년 초대소 사건도 역시 술자리 발언이 문제가 됐고, 2004년엔 측근이었던 최춘황 중앙위 제1부부장의 초호화 결혼식이 문제가 돼서 '분파 조장' 혐의로 장성택은 실각했습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고영환 국가안보전력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말입니다.
고영환: 혁명화 과정은 일종의 경고입니다. 너무 컸으니까 주의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바짝 엎드리지 않으면 다음번엔 죽을 수도 있다는 거죠. 이러니 다시 돌아오면 더 충실하겠죠. 그런 의미가 있는 게 혁명화입니다.
오뚝이 인생을 살았던 장성택. 그는 2006년 당 중앙위 제1부부장으로 전격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듬해에는 당 중앙위 부장으로 임명됐고, 2009년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된 뒤 1년 2개월 만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장성택은 김경희와 함께 김정은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런 장성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사람을 잘 챙기는 호인이었지만, 사실상 북한 권력의 참모장과 같은 역할을 해온 인물이라는 겁니다.
고영환 수석연구위원입니다.
고영환: 행정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이 다쳤죠. 그러나 그건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정부라는 게 보안, 보위, 사법, 검찰을 보는 곳이라 그 사람 사인 받아서 죽은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랬어도 북한의 현실에 대해 가슴아파했던 사람은 맞고, 참 아까운 사람 하나 간거죠.
남쪽에서 장성택은 개혁개방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로 평가됐습니다.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 장성택 숙청으로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이 더욱 저하되고 김정은의 공포통치가 강화됨으로써 북한에는 미래가 없다는 점이 다시 확인됐습니다.
남측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의 말이었는데요. 이처럼 남한 정치권은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비롯한 관계 개선이 어려워 질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장성택을 북한의 개혁개방을 추진했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성택은 한국을 찾은 적도 있는데요.
2002년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장성택이 남쪽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만나본 남쪽 인사들은 장성택을 신중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통일부 장관으로 환영 만찬을 주최한 정세현 원광대 총장은 남한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남한에 있는 동안 몸조심 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신중한 인물로 기억한다며 장성택에게 씌워진 체제 전복 등의 혐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택이 김일성 대학 재학 당시 총장이었던 고 황장엽 선생은 그를 '공부를 잘 하진 않았지만 예술 소조 책임자로 손풍금 연주가 일품이었고,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리에 밝고 영리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장성택은 형장의 이슬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나이 67세, 그의 총살 소식을 전한 조선중앙TV의 보도 화면에선 그의 얼굴과 팔에 난 선명한 멍자국을 볼 수 있었습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