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9년 북한을 방문했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위한 만찬에 동서양 요리가 망라된 15가지 요리를 내놓는 등 큰 성의를 보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지만 만찬 끝무렵 거듭된 아리랑 공연 관람 제의가 거절당하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정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약밥, 카나페, 칠면조꽃바구니, 줄도미수정묵, 남새생채, 감자떡, 검은닭인삼탕, 소라그라탕,피렌체식스테이크, 넙치구이,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 여기자 구출을 위해 2009년 8월 방북했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일행을 위한 만찬에 내놓은 요리들입니다.
동서양 요리가 망라되다시피한 15가지 음식이 나와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측 인사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오는 29일 일본의 문예춘추사에서 발간되는, 북미 간 접촉과 협상을 둘러싼 내막을 다룬 신간, ‘전쟁전야(戦争前夜)’에 실린 내용입니다.
책의 저자인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은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수행단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저자는 만찬 직전 이뤄진 김 위원장과 클린턴 전 대통령 간 회담에서 정작 북미관계 등 현안에 관한 얘기가 전혀 오가지 않아 미국 측 인사들이 의아해했다고 전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이런저런 화제거리만 계속 얘기할뿐 북미관계 개선 등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반면 미국 측은 여기자 석방에 관해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회담 분위기를 회대한 부드럽게 끌고가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이런 태도는 지나치리만큼 화려한 만찬 음식과 더불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체제선전용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라는 미국 측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김 위원장이 미국과 관계개선이 아니라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북한 체제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동기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을 불러들였다는 겁니다.
실제 김 위원장은 이날 만찬 도중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북한이 자랑하는 대형 집체극인 아리랑 공연 관람을 여러차례 집요히 제안했다고 마키노 지국장은 RFA, 자유아시아방송에 전했습니다.
마키노 요시히로: 김정일이 만찬중에 먼저 클린턴에게 '티켓을 세 장 갖고 있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아리랑 공연 티켓이었는데 한 장은 김정일 자신, 다른 한 장은 클린턴, 세번째가, 이건 김정일이 했던 농담인데, 자신의 애인 거라며 그래서 세 장이라고 재미있게 얘기했답니다.
하지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미 방북 전 북한이 아리랑 공연 관람을 제안할 경우 절대 수락하면 안 된다는 다짐을 국무부로부터 받은 상태여서 계속 못 들은 척했습니다.
김 위원장도 물러서지 않았고, 거듭된 아리랑 공연 동반 관람 제안에 배석했던 존 포데스타 전 백악관 비서실장이 큰 소리로 ‘우리는 안 간다’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이 때 김 위원장의 안색이 확 바뀌었고 그 이전까지 몇 차례 건배가 오가는 등 화기애애했던 만찬 분위기는 착 가라앉은 채 곧 마무리됐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그 동안 북미 접촉과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전현직 미국 관리 3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미국이 북한과 협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된 배경을 추적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국제적인 합의도 헌신짝처럼 쉽게 내팽개치고 오로지 체제유지만 중시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북한과 협상에 점차 흥미를 잃게 됐다고 결론내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이 북한과 협상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고충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상대방을 알 수 없는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김 위원장에 대해 일정부분 알게 됐듯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그를 알 방도가 없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