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남북 분단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는 판문점이죠. 최근에는 북한 전문 기자들조차 접근하기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과거 냉전 시기에는 남북의 판문점 출입기자들이 군사정전 회담을 계기로 정기적인 교류를 했다고 하는데요.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1960년대 판문점을 출입했던 신경식 헌정회장을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1960년대 남북관계는 굉장히 경색돼 있었지만 판문점을 출입하는 남북 기자들 관계까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신경식 헌정회장은 회고했습니다.
1960년대 대한일보 기자로 판문점 취재를 담당했던 신 회장에 따르면 당시 남북 기자들은 판문점 군사정전회담이 열릴 때마다 만남을 가졌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가정사까지 털어놓는 관계도 상당수였다고 합니다.
신경식 헌정회장(전 판문점 출입기자): 남북 기자들은 (판문점) 본회의가 열리는 동안 서로 어울려서 잡담을 나눴습니다. 과일이나 맥주를 나눠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판문점 북측 지역으로 못 넘어가는데 당시에는 판문점 지역을 남북한 상관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 지역에 있는 팔각정에 걸터앉아서 잡담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신 회장도 북한의 한 기자와 친분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신 회장은 “남한 화장품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북한 기자가 ‘화장품에서 왜 물이 나오나’라며 신기해 했다”면서 “당시 북한의 경제 수준이 남한보다 높았지만 소비재는 남한의 형편이 더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남북 기자들이 늘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남북 기자들 간의 물리적 마찰 등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북한 기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은 밝히지 않으면서 남한 기자들을 상대로 정보수집, 선전, 포섭 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신경식 헌정회장: 북한 기자들은 본회의에서 남조선 기자들을 만나면 무엇을 물어보고 선전할 것인지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백차가 불에 탔다'는 남한 보도가 있었는데 나와 친한 북한 기자가 "백차가 뭔가"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날 저녁 판문점 기자단이 서울로 돌아오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출입기자 전원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신 회장은 판문점 출입 당시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했습니다. 1960년대 남한에서 유행했던 ‘맘보바지’를 북한 기자들이 “가난의 증거”라며 북한 내부 선전에 활용했다는 겁니다. 신 회장은 “당시 북한 기자가 맘보바지를 입은 남한 기자에게 달려들어 사진을 찍어댔다”면서 “‘남한 경제 사정이 얼마나 나쁘면 바지통이 그렇게 좁은가’라며 비아냥댔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북한 기자와 교류했던 신 회장은 현재 남북관계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습니다. “남북 상황이 안 좋더라도 최소한의 대화는 필요하다”는 겁니다.
신경식 헌정회장: 남북 양측이 판문점 문을 닫고 있는데 한 곳이라도 통로를 만들어 (정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960년대에는 판문점 기자들을 보고 북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판문점을 다시 대화의 장소로 열어두면 정보 수집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편 신경식 헌정회장은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일보의 판문점 출입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13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한나라당 대선기획단장을 맡았습니다. 현재는 대한민국 헌정회장으로서 3월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