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가 북한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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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한때 남한에서 북한식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구속까지 당했던 인물이 최근 KBS 한국방송에서 대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 대북방송인 '국민통일방송'의 이광백 대표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 씨는 "라디오가 북한을 바꾸는 의미있는 변화를 만들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서울에서 박성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1992년 어느날,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 법대생이던 이광백 씨는 단파 라디오를 처음 접하게 됩니다.

규격지(A4) 한 장 크기에 두께만 7~8cm에 이르는 대만제 라디오였습니다. 남한 돈으로 20만원이 넘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당시 근로자들의 월평균임금총액이 87만원 가량이었으니 단파 라디오 한 대가 꽤 비싼 편이었습니다.

당시 이광백 씨는 남한에서 북한식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던 대학생 지하조직의 ‘교육선전국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북측 당국이 만든 책자와 대남 방송 내용을 발췌해 “교육용” 자료를 만드는 게 주요 업무였습니다.

이 씨는 북한의 ‘구국의 소리’나 ‘평양방송’이 당시 남측 대학생 운동권에는 “생명줄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광백 국민통일방송 대표 : 그건 저희들에게는 일종의, 북한에 있는 혁명 지도부와 연결해주는 도구였던 거 같아요. 소통 수단일 수도 있고요. 그런 의미가 저희에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걸 통해서 혁명의 지도부로부터 교육을 받고, 투쟁 지침을 내려받고 그랬으니까요.

대만제 단파 라디오를 처음 만져본 지 24년이 흐른 지금, 남한 사회에서 북한식 사회주의를 꿈꿨던 청년은 이제 남한에서 대북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대표적 민간 대북방송인 ‘국민통일방송’의 상임대표인 이광백 씨는 지난 9일부터는 KBS 한국방송의 라디오 채널인 ‘한민족방송’의 대표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입니다’의 진행도 맡고 있습니다.

이른바 ‘주사파’ 골수 학생운동권에 속해 있던, 그래서 1992년 12월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던 이 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북한식 사회주의를 남한 뿐 아니라 전세계로 전파하는 게 자신이 속해 있던 지하조직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는 이 씨는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200만~300만이 굶어죽는” 사태를 지켜보며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말합니다. ‘지상 낙원’이라고 믿었던 북한이 사실은 인민을 굶겨죽이는 독재 국가라는 사실에 “충격”받았다고도 말합니다.

이광백 국민통일방송 대표 :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이것은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식 사회주의의 명백한 실패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주체사상에 기초한 사회주의 운동을 할 의지도 열정도 없어지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 씨는 “이대로 절망하며 끝낼 순 없었다”고 말합니다.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시민운동을 하며 “21세기의 새로운 진보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합니다.

“남한을 북한식 사회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북한을 한국식 민주주의 사회로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 겁니다.

마침 이 씨가 예전에 속해 있던 지하조직의 운동가들 상당수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이 씨는 이를 받아들여 2002년부터 “새로운 혁명”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중국을 거점으로 삼아 북한에 “민주화의 씨앗”을 뿌리고 대북 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에게 자유와 인권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게 그 ‘혁명’의 출발점이었다고 이 씨는 말합니다.

특히 라디오 방송의 중요성을 이 씨는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북한 인구 2천5백만 중 5%만 된다면 북한 내부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이광백 국민통일방송 대표 : 우리가 했던 경험이 있지 않느냐. 우리는 (북한의) 대남 방송을 듣고 공부하지 않았느냐. 대북 방송을 하자. 거꾸로 해 보자. 대북 방송을 하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는 거기서 그 방송을 듣고 북한의 민주,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죠.

한때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남한에 심기위해 헌신했던 청년이 이젠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광백 씨는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바뀐 것이 “참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고도 말합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잘 이끌어 줬기 때문”이라며 자신에게 북한 민주화 운동을 권했던 과거 지하조직 동료와 선배들에게 감사의 말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씨는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의 끝을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광백 국민통일방송 대표 : 제 남은 인생을 과연 무얼 하며 살 거냐는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공교롭게도 여전히 북한 일을 하고 있어요. 방향은 정반대죠. 한국을 북한식 민주 사회로 만드는 게 아니라 북한을 한국식 민주주의 사회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어찌 보면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정신은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세상, 특히 북한처럼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는 북한 인민 2천5백만이 저처럼 좀 더 자유롭고 원하면 언제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고 풍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이게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이 씨가 대표로 있는 국민통일방송은 한국시간으로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그리고 새벽3시부터 5시까지, 매일 총 5시간 방송됩니다. 또한 이 씨가 KBS 한민족방송에서 진행을 맡고 있는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입니다’는 주중 낮 1시 10분부터 2시까지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