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장성택 처형은 김정은 제1비서의 미숙함이 초래한 사건이라고 한국의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가 평가했습니다. 최근 '장성택의 길'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 라 교수는 "앞으로 북한에서 장성택 같은 인물은 당분간 나올 수 없다"면서 그의 노선이었던 개혁도 "한동안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서울에서 박성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에서 장성택은 한국의 정주영 같은 인물이었다”고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가 평가했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에서 북한 담당 1차장 등을 지낸 라 교수는 지난 2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가진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회견에서 “장성택이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 같은 유능한 기업인이 됐을 것”이라면서 “그는 엄청난 사업을 맡겨도 잘 해내는, 경영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라 교수는 “장성택이 커피 가게 하나 없던 평양에서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를 맡아 훌륭하게 치렀다”며 이 같은 “유능한” 인물을 북측이 갑자기 처형한 것은 지도자의 불찰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라종일 교수: 그런 인물을 갑자기 죽여버린 건 역시 좀 미숙했기 때문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 아버지 같았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겁니다. 장성택이 미우면, 좀 눈에 거슬리면 어디 시골로 보내서, 아니면 공장으로 보내서 노동자 일을 하게 했다가, 또 데려다 놓고 다른 사람을 치는 데 써먹든지 했을 텐데, 김정은은 아마 그만큼 자기 권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죠. 미숙했기 때문에...
만약 장성택이 살아 있다면, 그는 제4차 핵 실험에 이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의 추가 제재를 받게 된 북한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라고 라 교수는 추측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하는 일이니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바깥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장성택이었기에 중국의 눈 밖에 나는 일이 북한에 어떤 결과를 갖고 올지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라 교수는 말했습니다.
라종일 교수: 반대는 못하겠지만 한숨을 쉬었겠죠. 왜냐면 (장성택은) 중국과 굉장히 가까웠거든요. 중국에서 대우를 잘 받았죠. 이 때문에 중국에서 이를 어찌 보는지 알고 있었고, 또 북한의 중국 의존도가 크다는 걸 알고 있는데, 중국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면서 이런 걸 하는 게 장기적으로 옳은 일인가 생각했겠죠.
라 교수는 “장성택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없어져 버린 인물”이라면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사람의 할 말을 대신 책으로 내 시신조차 없어져버린 그 사람을 세상에 다시 살려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신간 ‘장성택의 길, 신정의 불온한 경계인’(알마)은 2년여 집필 기간을 거쳐 지난 3일 출간됐습니다. 라 교수는 “이 책을 필자의 상상력에만 의존해 집필하지는 않았다”며 “때로는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자료들을 구하면서 가능한 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반영하는 데 충실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라 교수는 장성택이 “종합적인 국가개혁”을 시도한 인물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자신의 처조카 김정은이 집권한 직후 장성택은 당 행정부 산하에 ‘전략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종합적으로 북한 체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경제를 일으킬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장성택은 자신이 북한 경제를 개혁할 적임자라고 “자신했던 것 같다”고 라 교수는 추정합니다. “김정일의 와병 이후 김정은이 권력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장성택 자신이었기에 앞으로도 김정은을 보좌하며 개혁개방 노선을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라 교수는 말합니다.
실제로 장성택은 개혁의 일환으로 경제특구를 대폭 확대했습니다. “2010년에 기존의 나선 경제특구 이외에 5개 경제특구를 추가한 일이 있었고, 숙청당하기 직전인 2013년 11월 22일에도 총 13개의 경제특구를 확대 설치한다고 발표했다”는 겁니다.
평양시 택시회사가 “기존 1~2개에서 7~9개로” 대폭 늘어난 것도, 주택 거래를 합법화하는 조치가 시행된 것도, 그리고 ‘고려’라는 이름의 카드가 대외봉사기관과 외화상점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 등도 모두 김정일 와병 이후 장성택이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나타난 변화입니다.
장성택이 이처럼 경제 개혁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그가 바깥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았기 때문이라고 라종일 교수는 말합니다. 라 교수는 “장성택이 해외 사업을 많이 해 ‘나와 다니는 지도자’로 불렸다”면서 “바깥세상을 잘 아는 그가 볼 때 북한이 경제적 기반 없이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장성택은 중국식 개혁개방을 원했다고 라 교수는 설명합니다.
라종일 교수: 술이 막 취하니까 장성택이 “인민들이 다 굶어죽어가고 있다. 이걸 어찌하면 좋은가. 왜 우리는 중국처럼 못하나. 중국은 13억 인구를 먹여살리는데, 우리는 2천3백만을 굶기고 있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해요. 이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성택이 김정일에게 “정책 노선의 전환”을 제의한 일도 있었다고 라 교수는 말합니다.
“김일성 사망 후 추도 1주년 무렵, 관저 내 8번 연회장 2층에서 최고위급 30여 명 정도가 모여” 연회를 즐기던 중 “장성택은 김정일과 따로 앉은 자리에서 북한의 비참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열거하며 정책 노선의 전반적인 전환을 제의했다”는 겁니다. 당연히 김정일은 “격노”했고, 이에 장성택은 “김정일의 조모를 주제로 한 ‘사향가’를 불러 분위기를 전환했다”고 라종일 교수는 책에서 썼습니다.
장성택이 북한 권력의 핵심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처럼 개혁을 꿈꾸고 인민의 고된 삶을 위하려 했던 이유는 그가 “경계선”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라 교수는 설명합니다.
라종일 교수: 부잣집에 장가를 간 남자의 입장은 상당히 경계선상에 있을 수 있죠. 정권 차원으로 가면 문제가 아주 크죠. 정권 내부의 특권계층 핵심계층이기는 하지만 한 발이 밖으로 나와 있는, 그랬기 때문에 완전히 체제에 몰입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체제의 논리가 아니라 인민의 논리 혹은 개혁 개방의 논리를 주장하고 때때로 가능하면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계인’ 장성택. 그는 “북한의 ‘유일적 영도 체계’ 하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할”을 했습니다. 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입 밖에 낸 것 뿐 아니라 최고 지도자가 할 일까지 대신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겁니다.
라 교수는 그 사례로 “장성택이 2009년 당 행정부장의 직함으로 지방당 순시를 공식적으로 시행했고, 같은 해 2월 16일 김정일 생일에 있었던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밀영 행사에 중앙 주석단 간부로 공식 참여했으며, 이어서 양강도 당 전원회의에 지도간부로 참여했다”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경계선을 넘어선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2013년 12월 12일 장성택은 처형됩니다. 북측이 공개한 사형 판결문에는 “감히 김정은 동지의 유일적 영도를 거부하고 원수님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그 어디에 숨어 있든 모조리 쓸어모아 무자비하게 징벌할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라종일 교수는 “김씨 집안의 사위이면서도 정권의 실세로서 경험과 인맥을 두루 갖추었을 뿐 아니라 국내외 사정에도 정통해 남다른 경륜을 갖춘 장성택 같은 인물이 다시 등장하기란 어렵다”고 말합니다.
라종일 교수는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인 1998년 3월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에 임명됐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2월엔 대통령 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습니다. 이후 2001년엔 주 영국 대사, 2004년엔 주 일본 대사에 임명되는 등 주요 요직을 거쳤습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는 우석대 총장을 역임했고, 2011년 한양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가천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