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섭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국방부가 지난주 56쪽짜리 '2008 합동작전환경' 평가보고서에서 북한을 러시아, 중국, 인도, 파키스탄과 함께 아시아의 '핵보유국'으로 지목했습니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도 외교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즈> 최신호에서 '북한이 여러 개의 핵폭탄을 제조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국방부 보고서와 게이츠 장관의 지적이 나온 뒤 북한의 핵보유국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문제의 보고서가 나온 뒤 파문이 일자 '정책상 북한을 핵무기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 정부에 대해선 미국 측이 외교 채널을 통해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유력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방들은 비공식적으론 미국이 '핵무기 국가로서의 북한'과 더불어 살기로 결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불안감도 증폭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도 미국 정보당국이 90년대 후반 이후 북한을 핵능력을 가진 국가로 평가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으로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 파문을 계기로 북한 핵 협상을 주관하고 있는 국무부와 북한의 핵전력을 평가하고 준비해야 하는 국방부 간에 핵 위협의 평가를 둘러싼 시각차가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시아 국방 문제에 정통한 워싱턴의 외교 전문가는 미국 국방부 소식통을 인용해 "문제의 보고서에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명기한 것은 바보같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와 관련해 국방부와 백악관 혹은 국무부 간에 분열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순전히 허튼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통은 "현실에 대한 대처가 국방부의 주업이다. 따라서 북한 핵 협상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무기를 넘기지 않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면 이는 전략적인 현실(strategic reality)인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국방부는 북한 핵 문제를 전략적인 현실 차원에서 다뤄나가겠다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특히 현재의 상황은 북한의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핵계획을 포기시키기 위한 협상이 지속되고 있는 '외교적인 현실'에 해당하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외교적으로나 국가 정책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래리 닉시 박사도 "미국 국방부가 북한에 대한 비상 군사계획을 짜는 데 있어 핵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전략적인 현실'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 연구원도 "미국 정보당국은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북한이 핵물질을 확보한 핵능력 국가로 평가해왔다"면서 "그러나 미국이 북한이 핵을 가졌다고 평가하는 것과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클링너 선임 연구원은 특히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면 지금처럼 핵을 포기시키기 위한 6자회담을 벌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남한 언론이 문제의 보고서 내용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전문가들은 특히 미국 정부가 만일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이 문제를 '전략적인 현실' 차원에서 다루기로 할 경우 한국과 일본 등 미국의 핵심 우방은 기존의 대북 핵정책을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