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섭 기자가 보도합니다.
베이징에서 8일 개막한 6자회담에서 '시료 채취'(sampling) 문제가 최대의 걸림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앞서 미국 국무부는 힐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협상하고 시료 채취를 포함한 검증 방안에 관해 합의했다고 지난 10월 11일 공식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시료 채취에 관해 합의를 해 준 적이 없다며 미국 측 발표 내용을 공식 부인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하순 남한 제주도에서 열린 군비 축소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사는 "시료 채취를 부인한 북한의 공식 발표를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시료 채취에 관해선 분명 미북 간 비공식적인 양해가 있으며, 북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당시 회의에 참석해 그에게서 직접 이 말을 들은 미국 측 인사가 8일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힐 차관보도 최근 소규모의 비공개 모임에 참석해 논란을 빚고 있는 시료 채취에 관한 평양 협상의 정황을 소상히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미국의 외교 전문가는 "힐 차관보는 평양 협상 때 북측에 대해 '과학적 절차'(scientific procedures)와 관련해 미국이 원하는 검증 항목이 담긴 긴 목록을 제시했지만 북측은 '과학적 절차'란 말에만 동의하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힐 차관보는 북측이 동의하자 "곧바로 '과학적 절차'란 용어가 담긴 목록을 들어 보이며 시료채취를 포함한 모든 과학적인 문제가 이 두 단어에 포함된다는 것이 미국 측의 해석'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북한도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 힐 차관보의 전언"이라고 이 외교 전문가는 밝혔습니다. 이 전문가는 이어 "문제는 당시 힐 차관보가 북측과 구두로 합의한 내용이 문서화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북측이 당시 합의에 대해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힐 차관보의 협상에 대해선 국무부 내부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미국 외교전문가는 "힐 차관보의 평양 협상 때는 국무부 검증 준수국 관리조차 배석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실제로 검증 준수국의 폴라 드서터(Paula DeSutter) 차관보는 국무부가 미북 검증 합의에 관해 공식으로 발표하기 하루 전인 지난 10월 10일 '미북 합의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 자신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전문가는 이어 "국무부 관리들과 얘기해보면 모든 게 구두 합의, 다시 말해서 힐 차관보가 북측과 한 협상에서 나왔다고 생각한 것을 기록한 일방적인 '대화 비망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에 근거한 것이고, 그 때문에 북측도 쌍방 합의가 아니라며 부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힐 차관보를 탓하기 앞서 북측의 협상 행태에도 문제가 있다는 해석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 내 손꼽히는 북한 핵 전문가인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의 데이비드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 소장은 자유아시아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평양 협상 당시 미국과 북한은 지난 8월22일 중국 측 중재로 마련된 검증의정서 초안을 기초로 검증에 관해 분명 구두 합의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중국이 북한과 미국 측 의사를 담아 마련한 초안에는 영변 원자로에서 시료 채취는 물론 핵폐기물과 핵물질에 대한 수거, 핵물질과 장비에 대한 측정을 모두 망라하는 '과학적인 절차'가 명기돼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검증 의정서 초안을 근거로 합의한 이상 "설령 구두 합의라 하더라도 이는 분명 시료채취에 동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올브라이트 소장은 설명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이어 "북한이 시료 채취란 용어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다른 용어로 불러도 무방하지만, 만일 구두 합의를 부인한다면 이는 기존의 핵합의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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