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여중생 사건때 미군철수 안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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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0년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중생 장갑차 사건'을 계기로 주한미군 철수를 노렸던 북한 지도부가 "연평 해전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아쉽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세한 소식, 정영기자가 보도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2년 6월 13일, 한국에서 발생한 '효순이·미선이 사건'은 북한에도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이 사고 이후 미군 당국은 고위 군관계자들을 내세워 유감의 뜻을 전달하고, 유가족에게 위로금과 배상금을 전달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미군 장갑차 운전병의 부주의에 의한 '교통사고'로 결론 나는 듯 했던 이 사건은 한국 국민들의 반미 감정을 자극하면서 반미운동의 도화선으로 변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북한 고위간부들 사이에서는 "미군을 몰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연평 해전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얼마 전 중국에 나온 한 북한 인사는 "당시 남쪽에서 달아오른 반미시위를 바라보면서 평양 간부들 속에서는 미군을 몰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맞았다고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연평 해전이 발생하면서 말짱 도루메기가 되었다고 아쉬워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북한 인사에 따르면 노동당 대남공작기관의 전술은 '여중생 장갑차 사건'을 계기로 남한 주민들이 스스로가 주한미군을 내쫓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아올랐던 반미 감정이 2002년 6월 29일에 발생한 연평 해전으로 인해 역풍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 북한 인사는 "노동당 간부들 사이에서는 '그때 군대가 연평 해전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미군을 몰아낼 수 있었는데 안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북한 노동당 간부들 속에서 나타난 이러한 불만은 여중생 사건을 빌미로 촛불 시위를 조종했던 노동당 대남공작 부서와 연평 해전을 주도했던 북한 군부 사이의 마찰이 있었음을 반영했다는 지적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 고위층 탈북자는 "북한의 대남전략은 남조선혁명(대남적화) 노선을 관철하고 있는 노동당 대남공작 부서와 무력통일 노선을 추구하는 군부로 양분화 되어 있다"면서 "대남 전술과 관련한 최종 결론을 하는 북한 최고지도부가 남한에서 반미 감정이 달아오른 때에 군사 도발을 지시한 것은 오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북한 최고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10년 전 '여중생 장갑차 사건'이 미군철수로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고 이 탈북자는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