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1970년대 북한의 유명한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에 나온 실존 인물, 이백겸이 2009년 12월말 살고 있던 양강도 혜산에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전쟁 영웅의 서글픈 말로가 아닐 수 없는데요.
어찌된 사연인지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북한에선 어떤 줄기냐에 따라서 대접이 하늘 땅 차이입니다. 남로당 출신이면 제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고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합니다.”
김일성종학대학 출신으로 한국에서 유력 일간지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주성하 씨가 북한 사회의 특징을 얘기한 대목입니다.
사실 초창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초석을 쌓는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배경과 관계없이 전쟁 공로자들에게는 각별한 예우를 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국가의 보살핌은 전후 복구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이런 정책은 달라집니다.
이런 변화된 정책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남로당 출신의 의용군 병사들입니다.
북한이 1970년대 제작한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에 나온 주인공 이백겸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지금도 북한 도서관에는 비공개 도서목록에 이백겸의 수기가 있는데, 그 수기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 이백겸’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함흥 출신의 탈북자, 박광일 씨의 얘깁니다.
박광일:
6.25전쟁 때 후방에 침투한 남조선 특공대의 위치를 파악해서 북한 인민군이 남조선 특공대를 전멸하게 된다는 얘기로 이백겸 씨의 혁혁한 공을 예술 영화로 만든 겁니다. 어린 시절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본 기억이 납니다.
전쟁 공로자로서 나라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던 이백겸이 2009년 12월 28일 혜산의 한 장마당 인근에서 비참하게 굶어죽은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양강도 소식통들은 24일 이백겸의 죽음에 대해 이같이 전하면서 사망 직전까지 혜산시 연봉동 인근에서 오랜 세월 굶주림에 허덕이며 생활해왔다고 전했습니다.
다른 전쟁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이백겸은 1960년대 말까지 그야말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양강도 보위부 반탐과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남로당 당원들에 대한 숙청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남로당 출신인 이백겸도 비켜갈 순 없었습니다.
보위부에서 밀려나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천되고, 나중에는 지도원으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급기야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다람쥐와 쥐굴을 털며 산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비참한 삶을 맞게 됩니다.
탈북자 박광일 씨입니다.
박광일:
북한 사회는 끊임없이 권력구도에 의한 체제모순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요. 어느 한 순간이라도 김정일, 김정은 부자가 마음만 먹으면 중앙당 비서도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북한에서 정치적 배경과 출신성분만을 믿고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백겸의 고향은 강화도입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남로당 당원으로 활약했던 그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강화도와 인천일대에서 그들이 일컫는 수많은 반동분자를 색출하는데 앞장섭니다.
그때 그의 나이 22살.
약관의 나이에도 그 공로가 커 강화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 오릅니다.
6.25전쟁 때 북한으로 납치된 김추성 씨의 장남, 김동진 씨의 증언입니다.
김동진: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끌고 갔는데..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우리집에 찾아와 재산 압류 딱지를 붙였는데,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보니까 딱지에 이백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요. 강화도 정치보위부 부장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미군의 인천상륙이 시작되고 인민군이 후퇴할 무렵 이백겸은 의용군으로 들어가 후퇴대열을 따라 나섭니다.
대학 공부까지 마쳤던 그는 인민군에서 통신병과 무전수로 근무하면서 또 다시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전쟁 당시 한국의 특수부대가 후방에 잠입하는 것을 막는데 큰 전과를 올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북한의 주장대로 이백겸이 수 백 명의 간첩, 반동분자들을 잡았다면 당연히 죽는 날까지 나라에서 ‘공화국 영웅’으로 대접해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남로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날려 버립니다.
비참하게 살다 인생을 마감한 ‘버려진 영웅’ 이백겸을 통해 북한 사회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