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사이 많은 일본인이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인 납치 피해 사건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는 납치 피해자들의 무사 귀국을 기원하며 공동기획 프로그램 '당신이 안 계신 동안'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 시간으로, 납치 피해자 마츠키 카오루의 동생 마츠키 노부히로 씨의 얘깁니다. 노재완 기자가 마츠키 노부히로 씨를 만나봤습니다.
납치 피해자 마츠키 카오루 씨는 위로 누나들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1명이 있습니다. 남동생은 원래 누나의 아들이었으나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마츠키 집안으로 입양됐습니다. 카오루 씨가 실종됐을 당시 동생 노부히로 씨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컸지만 카오루 씨는 어린 동생을 잘 보살폈고, 공부도 잘 가르쳐주는 멋진 형이었습니다.
노부히로: 아무래도 형은 자신이 공부할 때 느꼈던 어려움을 제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형은 소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제게 학년이 2~3년이나 높은 참고서를 사 가지고 와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는 꼭 해야 한다면서 책을 계속 사들이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밖으로 막 놀러 다녔습니다. 그럴 때마다 형은 저를 끈질기게 쫓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노부히로 씨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공부를 가르치려는 형의 마음을 이젠 이해할 것 같다"며 "늦었지만 형의 그런 열정과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노부히로: 카오루 형, 형이 정말 이렇게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지만 '형이 있었을 때 좀 더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하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하잖아. 그때 형과 더 열심히 공부했었더라면 또 좀 더 많이 형과 놀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카오루 씨는 어린 동생에게도 친철했고 배려가 깊었습니다. "오히려 '형은 왜 화를 안 내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노부히로 씨는 "형이 가라오케에서 노래 부르는 사진을 봤지만 집에서는 거의 노래를 부르는 일이 없었다"며 "집에서는 늘 방에 들어가 공부하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노부히로: 형이 나온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저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의 학업 실력을 잘 압니다. 최종적으로 형이 간 대학은 정말 그 당시 형의 성적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무리한 곳에 지원한다고?" 할 정도의 대학을 갔습니다. 그런 점을 봤을 때 형이 대단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노부히로 씨는 잠시 큐슈학원에 대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형의 동급생이 자신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 형이 큐슈학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큐슈학원 교가도 불렀습니다.
(현장음: 큐슈학원 교가)
노부히로 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구마모토에 있는 아소산과 인근 바닷가에 가서 놀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성인이 된 카오루 씨는 부모님과 함께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같이 놀러 가게 되면 동생이 차멀미로 구토하면 카오루 씨는 조용히 뒤처리를 했습니다.
노부히로: 형이 운전을 잘 못 해서 따라가고 싶어 하지 않은 것 아는데 그때 형이 같이 가 준 날 하필 내가 차를 더럽혀서 형이 고생했지.. 이 말을 꼭 형이 들을 거로 생각하고 그때 일을 사과할게. 형이 일본에 돌아오게 되면 그때는 내가 운전할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돌아올 일만 생각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노부히로 씨는 또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기차역에 갔던 추억도 떠올렸습니다. 공부 때문에 객지에 나가 있던 형이 열차를 타고 구마모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늘 기차역에 마중에 나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노부히로: 형은 열차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특히 밤차를 자주 탔습니다. 형이 올 때쯤 아버지와 제가 역으로 마중 나갔습니다. 그런데 형은 가끔 언제 온다고 해 놓고 다른 날에 와서 아버지와 저를 온종일 기다리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카오루 씨가 스페인에서 실종된 뒤 8년 후에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는 훗카이도에 사는 이시오카 씨 앞으로 온 것인데 이 편지에 카오루 씨에 대한 얘기도 들어 있습니다.
노부히로: 편지가 온 것은 1988년이지만 저희 가족에게 통보된 것은 2년 후입니다. 이시오카 씨가 2년 간 저희 집을 찾았고 전화로 편지 내용을 알려주면서 형이 북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편지에는 형이 건강하다는 내용과 유학 전의 학교명이 적혀 있었고요. 중간에 합류한 아리모토 케이코 이런 분들과 사정이 있어 거기서 생활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지만 어떻게든 살고 있다며 자기들은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화를 받고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는 편지가 다른 사람을 통해 왔다는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형이 편지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편지를 통해 형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형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고 했습니다.
노부히로: 심정은 어쨌든 살아있다는 편지였기 때문에 다행이었고, 무사함을 기뻐하는 한편, 왜 형이 북한에 있지?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엄마는 "북한이라면 어렵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종전 직후에 북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 본 그런 자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본인의 생전에는 만나기가 어렵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결국 말씀 그대로 되어 버렸습니다. 북한을 아는 세대였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셨나 봐요.
북한 당국은 지난 2004년 카오루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면서 유골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당국의 조사 결과 유골은 카오루 씨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오루 씨의 것이라고 한 뼈는 사실 다른 여러 사람의 뼈가 들어 있었습니다. 치아형상으로 볼 때 고령의 여성임이 드러났습니다. 노부히로 씨는 북한 당국의 이런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형의 유골이 다른 사람의 것이란 것도 문제지만 북한 주민 누군가의 유골이 고향 땅에 묻힐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했습니다.
노부히로: 그 뼈가 형의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북한에서는 몇 번이나 그 뼈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조사 자료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조사 자료가 되었다는 말은 그 뼈를 돌려주지 못하게 됐다는 것인데 북한에도 그 뼈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는 거잖아요? 그걸 생각하니까 저는 더 슬펐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겼는데 먼저 자신의 근황을 알렸습니다. "학교 졸업 후 이러저러한 많은 경험을 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도쿄 인근 가나가와 현에서 트럭 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형을 아는 모든 사람이 형의 무사 귀국을 기원하고 있다"며 "만나는 그날까지 좀 더 힘을 내주길 바란다"며 형의 건강을 걱정했습니다.
노부히로: 카오루 형, 아마 내 목소리 잘 들릴 거라고 생각해. 형을 구하기 위해 가족 모두, 그리고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가족들도 카오루 형을 걱정하며 모두가 힘을 합쳐 형을 일본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형도 힘든 일이 많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 왔으니까 이제 한 번만 더 마지막 힘을 내자.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믿고 기다려 줘. 꼭 일본에 돌아올 수 있게 할 테니까.
자유아시아방송과 일본 납치문제대책본부의 공동기획 프로그램 '당신이 안 계신 동안',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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