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당신이 안 계신 동안] ② “코스모스처럼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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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사이 많은 일본인이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인 납치 피해 사건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는 납치 피해자들의 무사귀국을 기원하며 공동기획 프로그램 '당신이 안 계신 동안 '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 씨의 동급생 요시다 나오야 씨의 얘깁니다. 노재완 기자가 요시다 나오야 씨를 만나봤습니다.

지난 1977년 13살의 나이에 일본 니가타현에서 납치됐던 요코다 메구미 씨. 소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히로시마에서 니가타로 이사를 온 그는 요시다 나오야 씨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을 옵니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녔던 두 사람은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요시다: 당시 요리이 중학교는 소조 활동이 굉장히 활성화돼 있어서 방과 후 자주 연습했습니다. 메구미는 배드민턴부, 저는 농구부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연습할 때 체육관을 반으로 나눠서 했는데요. 예를 들어 왼쪽에서는 우리 농구부가 다른 한쪽에서는 메구미의 배드민턴부가 연습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농구부와 배구부 이런 식으로 반반씩 연습했습니다.

중학교 때 메구미 씨와 통학 길이 같았던 그는 학교 옆으로 바다가 있어 통학 길이 매우 낭만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요시다: 학교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일직선으로 바닷가를 끼고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3분에서 4분 정도 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요. 집에 가기 위해서 메구미는 이 사거리를 지나서 계속 걸어가야 했고 저는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했습니다. 사실 사거리 넘어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굉장히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거리 건너 쪽은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메구미가 친구 3명과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스포츠가방을 메고 귀가하던 뒷모습은 지금도 제 눈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요시다 씨가 말한 그 사거리 건너편에서 메구미 씨가 납치를 당했습니다. 그곳은 메구미 씨 집에서 걸어서 불과 2~3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시다: 저는 나중에 텔레비전을 통해 메구미가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 정말 살아 있었구나'라는 그 느낌. 기쁨은 아니지만 안심과 충격이 교차되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말 20년 동안은 전혀 아무런 단서도 없었습니다. 유괴나 살인 같은 거라면 어떤 단서라도 있었을 텐데 20년간 정말 아무것도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했었죠. 정말 메구미가 북한에 납치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는 메구미 씨는 노래면 노래, 운동이면 운동, 심지어 공부까지 잘하는 다재다능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메구미 씨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고 요시다 씨는 말합니다. 요시다 씨는 친구 메구미 씨와의 추억을 설명하면서 소학교 시절 한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일화는 졸업생 사은회 행사에서 있었습니다.

요시다: 그때 '슈만'의 '유랑의 무리'를 합창했는데 메구미가 독창을 맡았습니다. 오래된 곡이지만 워낙 유명해 지금도 가끔 들을 수 있는데요. 정든 고향을 떠나 꿈속에서 행복한 나라를 본다는 내용의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정말 몇 번을 들어도 가슴을 울립니다.

그가 메구미 씨 구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이름이 바바 요시에이였는데 잘 생기고 멋쟁이어서 메구미 씨가 교장 선생님을 매우 좋아했다고 요시다 씨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시다: 교장 선생님이 메구미의 납치 사실을 알고 나서 제일 먼저 구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에 납치됐다는 것에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이런 슬픈 일이 어디 있느냐며 앞장서서 활동하셨는데요. 그래서 매년 메구미의 생일인 10월 5일에는 일부러 니가타로 오셔서 생일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런 활동을 텔레비전을 통해 봤습니다. 그런 교장 선생님이 2006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쓰러지고 나서는 활동을 잘하지 못했지만 메구미 씨의 생일기념회만큼은 계속 챙겼습니다. 특히 2008년에는 다른 선생님들과 동급생들, 그리고 메구미 씨의 부모님까지 초청해 생일기념회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요시다: 이날 저는 십수 년 만에 동급생과 메구미의 부모님, 선생님들, 또 뇌경색으로 고생하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뇌경색으로 말씀을 잘 못 하는 상태였는데도 인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메구미가 납치되어 마음 아프다, 정말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내겠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2009년에도 생일기념회를 열었는데 요시다 씨는 그때를 계기로 메구미 구출활동에 동참했다고 말합니다.

요시다: 생일기념회가 끝난 뒤 가진 술자리에서 제가 메구미와 같은 납치 피해자들을 구출하는데 우리가 일을 같이 해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저는 바이올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 콘서트를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동급생들이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10년부터는 생일기념회 대신 ‘메구미와의 재회를 염원하는 자선 음악회’가 매년 9월과 10월 사이에 니가타현에서 열렸습니다.

요시다: 보통 음악회를 할 때는 다음을 기약하지만 이 음악회만은 그해가 마지막이 되길 희망했습니다. 내년에는 하지 않기를.. 올해로 마지막 음악회가 되길 간절히 기도했죠. 이렇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벌써 2017년이 되어버렸습니다.

음악회를 시작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 요시다 씨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여론을 일으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정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시의원들이 음악회에 참여했습니다.

요시다: 전(前) 납치문제대책본부 담당 대신이었던 후루야 의원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음악회 때 직접 클라리넷 연주를 했을 정도로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선배인 츠카타 이치로 의원도 매년 참석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음악회가 각종 매체에 더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급생의 아버지가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셨는데 그분의 도움으로 매체 관계자분들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올해 음악회도 니가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메구미 씨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음악회의 제목을 ‘잘 오셨습니다’로 바꿨다고 합니다. 제목만 봐서는 마치 귀국 환영행사처럼 느껴집니다.

요시다: 음악회에서 나오는 선율이 북한에 닿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꼭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메구미가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족이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메구미 씨 부친의 건강 상태가 요즘 들어 안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구미 씨가 이 방송을 듣고 부친의 상황을 꼭 알기를 희망했습니다.

요시다: 현재 메구미 아버님은 84세인데요. 최근 굉장히 몸이 쇠약해지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만나면 메구미도 놀랄 정도로 아버님이 아주 많이 마르셨습니다. 혼자 말씀하기도 힘드시고 허리와 다리힘이 약해지셔서 일어서실 때 옆에서 부축하고 신발도 신겨드려야 할 정도입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취재진이 친구 메구미 씨를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소학교 졸업문집이었습니다. 문집 마지막 부분에 메구미 씨가 속한 3반 글들이 있었습니다. 메구미 씨는 판화로 자화상을 그렸고 밑에 장래의 꿈을 적었습니다.

요시다: 이 졸업문집의 제목은 '거친파도'인데요.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제목을 붙여주셨습니다. 문집 안에는 교장 선생님이 쓴 글도 있습니다. 문집 3페이지에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앞으로 큰 시련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지면 안 된다. 앞으로 그런 풍파는 많이 올 것이나 그 시련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 문집은 항상 제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요시다 씨는 졸업 사진첩도 보여주었습니다. 단체 사진 맨 오른쪽에 교장 선생님이 있고, 맨 왼쪽에는 담임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메구미 씨는 가운데 두 번째 줄에 있습니다.

요시다: 메구미 씨 부친께서 굉장히 카메라를 좋아하셨는데요. 사진 찍을 때 자세 같은 것도 알려줬으리라 생각됩니다. 메구미는 항상 사진 찍을 때 이렇게 비스듬하게 서 있습니다. 사진첩에서도 이렇게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학교 졸업 사진첩에서는 메구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요시다 씨는 사진 속의 메구미 씨를 가리키며 “친구가 납치되지 않고 일본에 있었더라면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친구를 위해 바이올린 연주를 했습니다. 연주곡은 메구미 씨를 그리며 만든 노래 「코스모스처럼(コスモスのように)」입니다. 그는 연주에 앞서 이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요시다: 메구미가 어린 시절 집 앞 꽃밭에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가 키운 코스모스는 이상해. 보통 코스모스는 줄기며 뿌리, 이파리까지 다 얇고 그러는데 엄마 코스모스는 굉장히 두꺼워서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지금도 그의 어머니는 코스모스에 물을 주면서 딸 메구미가 이 코스모스처럼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 현장음)

자유아시아방송과 일본 납치문제대책본부의 공동기획 프로그램 ‘당신이 안 계신 동안’,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