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안녕하세요.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국전쟁 중 북한에 포로가 돼서 반세기 넘게 북에 억류됐다가 탈북해 남한으로 간 국군포로들은 남한에 가서도 북한에 남겨둔 가족 생각 그리고 동료 국군포로 생각에 마냥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미안한 마음과 걱정으로 살아간다는 이들을 이야기를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에서 들어봤습니다.
이태식:
아무래도 자식들이 북한에 있으니까 부모로 근심이 많습니다.
몇 년 전 탈북해 남한에 있는 국군포로 이태식(가명. 81) 씨의 말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준 귀환 국군포로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이름은 가명으로 하고 북한에서 자기가 어디에 살았는지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렇잖아도 북한 당국의 감시 속에 있는 북의 가족이 더 큰 피해를 볼까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국군포로는 남한에 가면 남한 돈으로 5억 원, 미국 달러로 환산해 약 45만 달러를 받아 금전적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지만 이미 80살 고령인 이들에게 돈이 행복을 보장해 주진 못 했습니다. 자신은 결국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찾았지만 아직 북에 남아 있는 가족과 동료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겁니다. 현재 남한의 6.25국군포로가족협의회에서 이사로 활동하는 이태식 할아버지의 말입니다.
이:
내가 국회에 나가 말한 것은 국군포로엔 관심이 없고 경제건설에만 집중했다. 그러니까 정부가 말하는 것이 북한에는 국군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해서 못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북한이 국군포로를 탄광에 몰아넣어 일을 시킨다는 것은 북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지난 1951년 강원도 전투에서 북한의 포로가 돼 북한 억류 기간 중 탄광 생활만 30년을 넘게 했다고 말하는 이 할아버지는 남한 정부가 국군포로 송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동료가 이미 강도 높은 노동과 굶주림으로 북한에서 억울하게 죽었고 생존해 있다고 해도 80살을 전후한 노인이 돼서 혼자 힘으로는 탈북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했습니다. 또 국군포로인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탄광일과 같은 일반 노역에만 동원될 뿐 상급학교 진학이나 군입대 그리고 입당이 되지 않아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생활로 고통받고 있다는 겁니다.
이:
김정일 정권이 언제 망하겠는지? 옛날 말에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단 말이 있는데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사회에 나왔어도 철창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일터나 사는 곳에도 밀정이 있어서 조금의 자유도 없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남한에서 얼마 전 새로운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린 이 할아버지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남한에선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매일 자전거로 인근 공원을 산책하고 있고 건강은 탄광일로 얻은 만성 천식 말고는 별달리 큰 문제가 없다며 북에 가족과 동료들 걱정뿐이었습니다.
이
: 나는 북한에 끌려가서 53년을 포로로 고생하다 탈북해서 왔지만 북에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고향 땅이라도 한 번 밟아보고 죽어야겠다 그런 심정인데 내 생활은 여기 와 사는 것이 인생 말년에 행복한데 행복하면 할수록 북에 있는 국군포로가 생각납니다.
몇 년 전 탈북에 성공해 남한에 간 또 다른 국군포로 김병호(가명. 81) 할아버지도 자신이 북한을 떠났을 당시 북한의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며 북에 있는 가족이 올봄을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김:
말이 아니죠. 먹을 것이 없어서요. 농촌에 있는 사람은 산을 일귀서 농사를 짓고 도시 사람은 장사 해서 먹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굶어 죽고 그랬죠. 60년 동안 북에 있다 나오니까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북한 사람도 여기 남한 사람처럼 편안한 삶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김 할아버지는 올해 80살이 넘었지만 건강에 큰 문제가 없어 아침에 일어나면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생활용품을 사러 백화점에도 다니면서 하루하루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남한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은 또 다른 국군포로 출신 최재봉(가명. 79)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탈출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기도 하지만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사실을 자신도 아직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최:
죽을 뻔했습니다. 80살 돼서 두만강을 건넌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때가 6월인데도 어찌나 추운지 말을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자식한테 말도 못하고 떠났습니다. 하면 못 옵니다. 내가 98년부터 시도를 했는데 내가 떠나면 6가족 먹여 살렸는데 …발걸음이 안 떨어졌었죠. 그런데 크게 맘먹고 와보니까 북한 자식 생각이 더 납니다. 이 좋은 사회에서 한 번 같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죠.
탄가루를 많이 먹어서 폐가 나쁘다는 최 할아버지는 남한으로 간 다른 국군포로들처럼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매일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해 등산을 간다는 최 할아버지. 얼마 전에도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화교를 통해 북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돈을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최:
돈은 북한에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 일없는데…지금까지 여섯 번 정도 해서 8천만 원 보냈습니다. 자꾸 돈 달라고 하니까 안 보낼 수도 없고 해서 보냈는데 절반만 받았어도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 전달이 안 된 것 같아요.
한국 돈으로 8천만 원이면 미국 돈으로 하면 7만 5천 달러 정도가 됩니다. 최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다른 국군포로도 북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한에 있는 국군포로 귀환자들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이산가족이 돼버린 북에 있는 가족과 함께 있습니다.
김:
몸이 건강해야 아들 딸을 보겠는데 너무 억울합니다. 인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배급도 안 주지 어떻게 살라고… 빨리 통일이 돼서 북한 인민이 잘사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한편 남한 정부는 국군포로와 그 가족에 관한 필요한 대우와 지원 규정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법의 명칭은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입니다. 그리고 주거지원 즉 남한에서 살게 될 집을 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15만 달러 정도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한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간 국군포로의 수는 1994년 고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79명이며 북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의 수는 56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오늘은 남한으로 간 국군포로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였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