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는 법률이 정하는 인신 구금시설인 교화소나 노동단련대 외에도 교화소나 관리소 등 북한 법률에서조차 명시하지 않는 구금시설이 북한 전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중에는 겉으로 보면 일반 마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용소로 운영되는 곳도 있는데요 오늘은 18호 관리소 출신 김혜숙 씨를 통해 북한의 숨겨진 수용소에 대해 알아봅니다.
탈북여성 김혜숙 씨는 연좌제로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간 경우입니다.
김혜숙: 가족은 1970년 10월28일 그때 들어갔어요. 아버지, 어머니, 친할머니 동생 두 명 데리고 저는 3살부터 외할머니와 평양 새살림동에서 살았어요. 그때 추방 시키면서 난 먼지역이고 애기라 안 데리고 갔고 가족보다 5년 뒤인 1975년 2월 말에 들어갔어요.
김 씨는 왜 자기가 수용소로 가야 하는지 죄목도 모른 채 평안남도 북창군 석산리 제18호 수용소로 갑니다. 그때 김 씨의 나이 13살.
김혜숙: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외할머니가 늙었는데 담당 지도원이 아버지를 따라 보내야 한다고 계속 오거든요. ‘바뀐구역’이라고 그랬어요. 짐 싸라고 해서 학용품만 싸서 하고 고모하고 버스타고 가니까 철조망이 있더라고요. 밤이 되니까 엄마가 나왔어요. 난 엄마라고 하는 것이 거지같은 모습으로 왔더라고요. 엄마 모습이 없고 신발도 새끼로 동여매고 나왔더라고요. 많이 걸어갔어요. 초행이라 더 멀게 느껴졌겠죠.
평양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학교에 다니던 오랜만에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기쁨보다는 낯설고 열악한 생활환경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수용소에서도 중학교 공부까지는 시켰는데요.
김혜숙: 나는 한자 조금 배우고 중학교 2학년이니까 알파벳 송을 조금 배우다 들어갔는데 그런데 거기는 혁명활동, 공산주의 도덕, 국어 이런 것은 있는데 우리 평양에 없던 과목은 당정책이라고 김일성이 현지 지도한 그런 과목이 있더라고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아이들도 있는데 낙제를 시키지 않고 다 졸업을 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남자는 굴진공 여자는 채탄공으로 탄광으로 몽땅 배치를 해요.
기자: 16살부터 탄광에서 일했다는 건데 노동강도는 어떤가요?
김혜숙: 안전교양을 일주일 하는데 노동자는 하루에 8시간 노동 4시간 학습이라고 하지만 8시간 하는 때는 없고 16시간 18시간 이렇게 탄광일을 시키죠. 빈혈로 죽는 사람 탄광 무너져서 죽는 사람 발파사고로 죽는 사람해서 죽은 시체가 많지만 너희는 죽어도 된다는 식으로 대책이 없어요.
수용소에서 제일 힘든 것은 항상 부족한 식량과 도급제로 주는 노동입니다. 김 씨도 마흔이 넘어 해제민이 될 때까지 탄광일을 하면서 진폐증에 걸려 호흡장애로 고생하고 있는데요. 수용소에는 여자나 남자나 인간이 아닌 생산을 위한 노예 취급을 받는 다고 말합니다.
김혜숙: 여자라고 봐주는 것은 없어요. 그런데 여자는 보조노력이니까 그래도 여자는 막 때리지는 않는데 남자는 막 때리는 거예요.
기자: 18호 관리소에서 배급은 있습니까?
김혜숙: 우리가 일곱 식구였는데 강냉이를 한 달에 7.5-8kg 줬는데 말려서 갈아서는 하루 먹을 양을 한 봉지씩 해놔요. 너무 배가 고프니까 도토리 잎사귀 날 때부터 파란 것은 다 먹었어요.
기자: 다른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해 쥐도 잡아먹고 했다고 하는데
김혜숙: 그런 거 많지요. 막장에서 하양쥐 큰 것을 잡아서 통째로 물 넣고 끓였는데 얼마나 물이 단지 몰라요
김 씨는 18호에서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북한에선 유명 과학자 했던 백설희 씨를 손꼽습니다.
김혜숙: 김일성 때 애기들이고 어른이고 노래를 배워서 다 알아요. 건설 사업소 출근하는 데 돌아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지름길로 가는 데 백설희가 앉아있는 거예요.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신문에서는 많이 봤지만 모습이 너무 초라해 못 알아 본거예요.
그리고 백설희 씨를 마지막 본 것은 김 씨가 해제민으로 마을을 떠나기 전날이었다면 백설희를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을 들려줍니다.
김혜숙: 아무리 바쁘지만 일으켜 세웠어요. 이 몸으로 어딜 가는가? 하니까 노동과엘 간다는 거예요. 이 늙은 몸으로 왜 노동과를 배치 받으러 가는가? 했더니 내가 백설희야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키는 나보다 더 작고 피부는 철색인데다가 앉아있는데 무릎이 물이 찼는지 부었더라고요. 내가 2002년 8월 16일에 나왔거든요. 나오기 전날 백설희 엄마를 오라고 해서 양말, 된장, 소금 조금 해서 남은 것을 몽땅 백설희 주고 나왔거든요
2009년 탈북해서 중국과 제 3국을 거쳐 남한에 도착한 김 씨는 현재 생활이 18호 관리소 책임비서 생활 못지않지만 수용소에서 얻은 병과 그곳에 남아 있는 가족 생각에 마냥 행복해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김혜숙: 그래도 맘이 좋지는 못해요. 아직 동생들 거기 있지 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북한에서 죽었는줄 알았는데 살아 있는데 만나질 못하니까요? 항상 맛있는 것 먹어도 그래 아직도 꿈을 꾸면 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났는데 18호 꿈을 꾸지 한국 꿈을 꾼 적이 없어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의 18호 수용소 김혜숙씨의 증언을 들려드렸습니다. 진행에는 RFA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