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국군포로가족회 총무

유영복 귀환국군용사회 회장이 2014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귀환국군용사회 창립기념 증언 및 정책제언 세미나'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유영복 귀환국군용사회 회장이 2014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귀환국군용사회 창립기념 증언 및 정책제언 세미나'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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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6.25전쟁 때 북한군에 포로가 돼서 남한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자기 의사와는 정반대로 북한 땅에 억류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국군포로입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탄광광산으로 보내졌고 그들의 자녀도 대를 이어 최하층 계급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6.25국군포로가족회 총무 탈북여성 김현서 씨 이야기 전합니다.

김현서: 묏자리를 봐놨다고 하더라고요. 올라가 보니까 남쪽으로 가는 길이 쭉 나있더라고요. 여기서 고향이라도 지켜보고 싶다고 나를 꼭 여기다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셨어요. 아버지 관을 메고 고생하면서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묻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탈북여성 김현서 씨는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자녀로 탄광일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들은 함경북도의 아오지를 비롯해서 지금의 새별지역과 온성-회령 무산지구의 탄광 광산에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북한여성과 가정을 꾸리게 합니다.

김현서: 어머니는 그냥 북한 분이예요.

기자: 국군포로인줄 알고 결혼을 하신건가요?

김현서: 제가 알기로는 6.25전쟁을 하면서 남성이 많이 죽었잖아요. 전쟁으로 군에 나가서 싸우다 죽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든 탄광광산을 돌려야 하는데 사람이 모자랐던 거예요. 막말로 국군포로들을 모아 놓고 북한 여성을 씨받이로 한 거죠. 탄광광산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여성들을 중매결혼 시켜서 국군포로들을 살려줬다 이러더라고요.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에 살던 국군포로 80 여명이 각각 탈북해서 남한에 갑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받아들여 보상금과 생활지원금을 제공합니다. 또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낳은 자녀들도 2000년대 중반 대거 탈북 했고 그 수는 98세대 302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들 국군포로 자녀에 대한 보상법은 없습니다.

김현서: 전혀 없어요. 솔직히 너무 섭섭한 것이 북한과 너무 대조적 이예요. 북한은 한국전에 참전했다든가 하면 대대손손 우대를 받거든요. 손자가 공부를 못해도 자동으로 승진을 해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어요. 우리는 북한에서 너무 가혹하게 짐승보다 못한 처우를 당했어요. 말도 바로 못하고 머리도 바로 쳐들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아버지 유언대로 한국에 오면 북한에서처럼 그런 대우를 해주는가?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그런 것이 없더라고요.

평생을 북한에서 사람값 없이 최하층으로 살던 이들은 교육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탈북자들과는 또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한국정부는 국군포로 자녀에 대해 4,79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아직 북한에 있는 사람은 가족 중 행방불명자가 발생해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을 텐데 그런 것을 예상하면서도 연락조차 할 수 없는 겁니다.

김현서: 다른 분들은 되는데 국군포로들은 안돼요. 북한에서 알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송금할지 몰라도 우리는 안돼요. 괜히 국경연선에 있다가 잘못되면 우리 형제를 우리가 죽이는 거나 같거든요. 오라 해도 솔직히 그분들이 오지 않아요. 받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겠어요? 경제적으로 도움 받고 싶죠. 우리도 도와주고 싶고요. 그런데 안돼요. 일반 사람들하고는 틀려기 때문에.

중국 생활을 거쳐 남한에 왔을 때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기도 했는데요.

김현서: 많이 놀랐죠. 정말 어떻게 한마디로 말 못하겠는데 이 나라가 지상천국이고 너무나 우리가 속켜 살았구나. 우리가 이 나라 짐승보다 못하게 살았구나 하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모든 것이 북한이 말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도 믿질 않을 거예요. 우리는 마음대로 고깃국에 쌀밥은 예사인데 북한은 그렇게 먹는 것이 소원이잖아요. 그리고 입는 문제도 그렇죠. 옷도 낡은 것을 기워 입고 여자들은 브라지어도 없이 살고 그랬는데 여기 와 보니 너무나 몰랐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그게 수치스럽고요.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그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해도 아마 이해를 못할 거예요. 저도 중국 땅을 넘어서면서 배신감을 느꼈거든요. 왜 그랬는가 하면 브로커가 김정일 욕할 때 저는 내가 잘못 걸려들었구나. 간첩놈에게 걸렸구나. 이랬는데 중국에서 있으면서 보니까 여기가 천국이구나 그랬거든요. 북한에 놓고 볼 때 중국이 천국이라고 생각했어요.

김현서 씨는 한국에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열심히 움직이면 움직인 만큼 내 것이 되는 거라며 북한에서는 개인은 없고 당과 수령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 내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50대가 된 김 씨는 생계걱정은 없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는

김현서: 그런 것 걱정 없어요. 나라에서 쌀 주지, 돈 주지 이 나라는 일 못하는 노약자 생계비 다 주고 정착을 못했을 때는 나라에서 와서 어떻게 사는 가 와보고 없는 것은 다 해결해 주고 배우고 싶으면 무료로 배우게 해주고 저도 국가자격증을 5개 정도 땄어요. 북한에서는 배우고 싶어도 배우질 못했어요. 그런데 와서 이런 혜택을 받고 아파서 병원에 가도 우리는 우대잖아요.

남한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컴퓨터 자격증 3개를 땄고 피부미용사, 탈북자 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했다는 김 씨. 이젠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북한의 고향이 많이 그립다고 합니다.

김현서: 저는 아버지 유언을 받들었을 뿐이고 와보니 너무나 속아 살아온 40년 세월이 억울했고 내가 가고 싶다는 말은 그래도 내 부모가 묻혀있고 내 형제가 살고 내가 거기서 나서 자란 고향이니까 아픈 추억이 있지만 여기서 잘 살고 있으니까 가보고 싶은 거예요. 북한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너무 가보고 싶어요.

김현서 씨는 6.25국군포로가족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남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녀 92세대가 모인 단체인데요. 단체에서는 국군포로 문제는 국가의 본분과 도리 차원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할 문제라면서 미귀환 국군포로들과 그 자녀들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탈북해 남한으로 간 국군포로의 딸 김현서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