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국군포로란 한국전쟁 즉 6.25 전쟁의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측으로부터 남측으로 송환되지 않거나 실종된 군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탄광광산으로 보내져 힘든 생활을 하는데요. 대표적인 곳이 아오지 탄광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은덕군인데요. 이곳의 지명은 세월이 흐르며 아오지에서 경흥군으로 바뀌고 지금 함경북도 은덕군으로 불립니다. 50대 중반에 국군포로 자녀로 탈북해 남한에 사는 이수련(가명)씨에게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사연 들어봅니다.
이수련: 우리 아버지는 육군 5사단에서 복무했고 제가 구체적인 것은 모르는데 육군 5사단은 기억을 해요. 아버님이 생전에 얘기를 하셨어요.
이 씨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쪽 친척은 모두 남조선에 살고 어머니 쪽만 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수련: 제가 어릴 때 아버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10살 되기 전까지는 잘 모르고 아버지가 나한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고만 느꼈지 어리니까 몰랐어요. 그런데 학교 들어가서 철이 좀 빨리 들었는데 장래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학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우리 아버님이 남한에서 왔고 성분이 나빠 대학도 갈 수 없다는 것 알았어요. 그래서 어린 나이지만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왜 남조선에서 왔고 다른 사람 같지 않고 탄광에서 일하는 나쁜 사람인가 하고 막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버님 말씀이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나중에 통일이 돼서 남조선에 가면 꽃다발을 목에 걸고 너희는 영웅의 딸이라며 환영할 것이라면서 아버지 부대에 찾아가 훈장도 받고 환영도 받으라고 계속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의 출신성분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하늘이 무너지듯 했고 어린 마음에도 억울함과 알 수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린 딸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지만 부녀지간의 관계는 아버지 의도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수련: 나빠졌습니다. 제가 철이 없다보니 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북한 세뇌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정말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이해를 할 줄 알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난 우리아버지가 정말 나쁜 놈이구나. 남조선에서 온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 아버지를 살피게 된 거예요.
천륜의 정까지 저버리게 만든 상황. 딸이 아버지를 의심하고 행동을 감시하기까지 합니다. 일상적인 대화가 이뤄지기 힘들게 됐고 불신만 더해 갑니다.
이수련: 그때 내 어린 나이에 생각에 우리 아버지는 원한을 안고 사는 구나하고 알았어요. 아버지가 우리 어릴 때부터 우리가 북한에서 낳으면 북한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하는데 오직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남조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를 앉혀놓고 남조선 아버지 고향의 지형은 어떻다 그리고 남조선이 북한보다 살기 좋다 이런 얘기만 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 머리에는 남조선 생각밖에 없구나. 이 생각을 하니까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구나 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죠.
집안에선 4남매 중 맏딸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다툼이라도 심하게 할 때면 동생들을 데리고 자릴 피합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 싫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토대는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터집니다.
이수련: 학교 선생님이 얘기를 해줬어요.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하면 아오지 포로수용소에 있었잖아요. 우리가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후에 어머니에게 물어봤어요. 43호가 뭔가? 왜 아버지에게 숫자가 붙었는가 하니까 어머니가 사정을 말해줬어요. 그리고 우리가 하모니까 사택에 살았어요. 예전에 수용소 자리인데 일본사람들이 집을 지어놨는데 한 줄에 10세대가 사는데 마지막 집이 반장네 집이예요. 그 사람이 감시원이예요. 내가 커서 알았어요.
기자: 아버지와 관계가 좋아졌나요? 아니면 아버지를 계속 원망했나요?
이수련: 원망했어요. 왜 그랬나 하면 우리 남동생이 외아들인데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다른 안전부 아들이 한 짓을 동생에게 혐의를 씌워서 총살 했어요. 아버지를 정말 원망했어요. 돌아가시는 날까지 우리 아버지는 왜 나쁜 놈이 돼서 남동생까지 죽이는가 하고 계속 원망했어요.
기자: 탈북 하게된 배경은 뭔가요? 아버지 사건입니까? 고난의 행군 때문입니까?
이수련: 아버지 원한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망하고 막내 동생 죽고 그 사회에서는 더 이상 못살겠더라고요. 제 자식들 앞길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도망쳐 나왔어요.
북한의 다른 지역과 달리 아오지에서는 1992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자신이 탈북 했을 2004년까지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 씨가 말하는 아오지는 이런 곳입니다.
이수련: 아오지는 사람 못 살 데예요. 아오지는 산이 많고 땅도 돌멩이에 평지는 진흙땅이어서 비가 오면 신발 신고 걷지도 못해요. 맨발로 걸어야 해요. 농사도 못해요. 탄광사람들은 도시락도 못 싸가서 배가 고프니까 일할 때 너무 배가 고파 석탄을 다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어머니가 아버지 도시락을 싸드리면 다 먹지 않고 반은 가져와 우리 자식들에게 주셨어요. 커서 생각해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배가 얼마나 고팠을까 배가 고프니까 탄광에 들어가서 석탄을 먹고 옷자락을 먹고 했다는데 그 말을 들을 때도 아버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 아오지 탄광에서 12시간씩 일하며 살았으니 지금도 아오지 말 들으면 치가 떨려요.
세월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아버지에게 꼭 직접 전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이수련: 아버지에게 하고 들려주고픈 말이 너무 많아요. 감사하고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이시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는지 이제야 절절히 느끼고 정말 좋은 아버지를 두고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원망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아버지 제가 잘못했다고 빌고 싶고 사랑한다고 백번이고 말하고 싶어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국군포로 자녀 이수련(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