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국군포로가족회-한영복 대표

0:00 / 0:0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지구상에 어느 나라가 반세기 넘게 두 동강이 나서 이산의 고통을 품고 살겠습니까? 한반도 남과북의 주민은 6.25전쟁을 치루고 그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6.25 국군포로가족회 한영복 대표의 사연을 들어봅니다.

한영복: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라 7월까지는 마음고생이 많습니다. 7월27일 정전일까지요.

남한에 사는 3만 여명의 탈북자 중에는 북한에서도 가장 하층 국민으로 차별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입니다. 한영복 씨 아버지도 국군포로입니다.

한영복: 아버지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셔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서 1951년에 북한군에 포로가 돼서 함경북도 회령군 탄광에서 채탄공으로 일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에서 노역하다가 은퇴해 2003년 사망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자신의 주민들에게 계급처럼 숫자를 붙여 부릅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1호 가계는 김일성 일가, 2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과 그 가족, 이런 식으로 쭉 서열을 정한 것에서 제일 마지막에 분류된 것이 국군포로입니다.

한영복: 우리 북한에선 국군포로들을 규정하기를 43호 가족, 남반부 출신가족, 괴뢰군 가족 이렇게 불리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학교 다닐 때 제일 억울했던 것은 매 학년 올라갈 때마다 아버지 고향이 남쪽이고 조선노동당 당원이 못됐고 이런 것으로 우리가 차별받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올라가서는 국군포로 자식은 군대도 못 가고 대학도 못 간다 하지만 국군포로 자식이라 해도 의용군 자식들은 군대도 가고 대학도 가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탄광 출신은 대체로 아버지와 함께 지하막장 채탄공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국군포로들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때마다 혹시나 자신이 불려 나가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들 대부분이 느꼈을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2000년 김대중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냈을 때였다고 한 씨는 기억합니다.

한영복: 아버지가 생전에 명절 때면 술을 많이 드시고 엄마를 찾으며 우셨습니다. 저희들 보기에도 나이드신 분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것이 보기 민망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제일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남쪽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올 때입니다. 그때 국군포로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고 그때 당시 고향으로 가게 됐구나 하면서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찾지도 않고 소식이 없으니까 자살도 하고 돌아가시고 했습니다. 많이 기다렸는데 온 사람이 끝이고 남한에서는 찾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팠고 우신 것 같아요.

국군포로의 자녀 중 탈북해 남한으로 간 이들은 105세대로 200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귀환한 국군포로는 81명 그 가운데 39명이 생존해 있습니다.

한영복 씨는 탈북에 성공해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 고향인 남한에 2004년 입국합니다. 그리고 매년 전쟁이 발발한 여름이면 아버지 생각에 밤잠을 설칩니다.

한영복: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행사를 많이 하는데 말로만 6.25때 싸운 사람들 잊지 말자고 하지 피부에 닿는 행동 그런 것이 없어요. 우리들 아버지 고향에 가면 환영을 받는다고 알고 돌아가셨는데 잘못 알고 돌아가셨구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기자: 방송을 듣는 청취자가 혼란스러워할 것 같은데요. 귀환 국군포로 당사자는 특별법이 있어서 보상을 받는데 지금 말씀하신 부분은 그 가족에 대한 보상이 없다는 말씀이죠?

한영복: 네, 그렇죠. 우리는 저희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명예회복을 해주고 자식들에 대해 정부에서 일자리라도 해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남한으로 귀환하지 못한 국군포로는 남한 국방부에 의해 전사자로 처리됐습니다.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탈북해 남한에 간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부모의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없게 된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한영복: 지금 명예회복을 해달라는 것이 우리 아버지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분단이 돼서 포로가 돼서 살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탄광광산 채탄공, 발파공으로 일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명이 길어서 전쟁 때도 총에 맞고 살아났고 갱도가 무너졌어도 살아났지만 다른 분들은 갱도가 무너져 사망하고 탄차에 끼어죽고 발파에 맞아죽고 했습니다. 살아온 사람들은 명예가 회복이 되고 저희 아버지들은 북한에서 사망인정을 안 해주는 관계로 해서 1950년 6.25일 전사로 돼서 자녀들이 호적정리도 안됩니다.

한 씨가 남한에 갔을 때는 아버지와 자신이 북한에서 국군포로였기 때문에 받은 설움을 당연히 보상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한영복: 한국에 오니까 아버지가 1950년 6월 전쟁 일어난 날 전사로 돼있더라고요. 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북한에서 돌아가신 날짜로 전사 날짜를 정정해 달라는 겁니다.

아들이 탈북해 남한에 가서 국방부에 아버지 사망일을 알려줘도 행정 절차상 정정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한영복: 국방부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답니다. 왜냐고 하니 북한에 신원조회를 요구했는데 협조를 안 한다는 겁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구실이고 자식이 여기 와서 국방부에서 하라는 대로 작은아버지, 고모 유전자 검사를 하라고 해서 검사결과 일치로 나왔습니다. 그러면 우리아버지가 국군포로 맞겠죠? 자식이 맞는데 왜 북한에서 협조해주기를 기다립니까?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분단의 현실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하루속히 해결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씨는 오직 한 가지를 남한정부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영복: 북한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대한 올바른 명예회복을 해주고 그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6.25 국군포로가족회 한영복 대표는 아버지처럼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를 위한 시를 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한영복: 이번에 추모시를 만들어 봤습니다. 제목은 ‘임이시여’입니다. 임이시여 꽃은 피고지기를 수십 년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하기도 어느 듯 수십 년 하지만 어이하여 임이시여 떠나시던 그날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이 땅에 돌아오실 수 없으신지요.

임은 환한 웃음과 함께 승리의 태극기 휘날리면서 고향땅에 돌아오리라 굳은 약속 남기시고 떠나셨지요. 임이시여 정녕 그대는 그렇게 청춘의 꿈과 승리의 그날을 그리시면서 총포탄이 빗발치는 불타는 전호 속에서 한줌 흙으로 이 땅을 떠나 가셨었나요.

그러나 임은 고향의 그리운 부모형제 자매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저 멀리 북녁땅 그곳에 살아도 산사람이 아닌 그런 처절한 삶으로 살아계셨습니다. 임이시여 어찌하여 그대는 국군포로병의 아픔을 안은 채 북녘땅 이름 없는 탄광 그 차디찬 어두운 광속에 임의 청춘을 묻으셨나요.

임의 흘리신 피눈물 임이 받아오신 뼈에 사무친 아픔과 상처들 아직도 북녘땅 그곳에 자욱자욱 남겨져 있는데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이 행복 오늘의 이 나라가 임이 청춘과 바꾼 것이었음을 임의 피눈물로 이루어 졌음을 .

부르고 불러도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임이시여 북녘땅 그곳에서 한줌 흙이 되어 하늘나라 그곳으로 떠나가신 국군포로 병사들이시여! 임들이 있었기에 임들이 이 나라를 지켜내셨기에 우리의 행복한 가정도 이 나라도 있었습니다.

임이시여 정녕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될 임이시여 국군포로 장병들이시여 6월의 오늘 임들을 그리며 임들의 영전에 삼가 이 시를 드립니다. 임들의 못다 피운 꽃다운 청춘 임들이 북녘땅 그곳에서 흘리신 피눈물 임들의 후대들이 받았을 뼈아픈 상처 영원히 잊지 않으렵니다. 임이시여 임이시여 고이 잠드시라...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6.25 국군포로가족회 한영복 대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