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요즘 남한 단체들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행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최근 남북한 젊은이들이 도이칠란트를 방문해 통일의 역사를 체험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행사에는 1992년 초부터 95년 말까지 도이칠란트의 통일과 그 이후 민족통합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연구하고 본국에 보고했던 신덕수 당시 남한 통일 사무관이 함께 했습니다. 신 전 사무관에게 도이칠란트 통일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기자: 독일 통일 당시 한국 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이었나요?
신덕수: 관심사는 동독의 인민들이 평화시위를 통해 민주혁명을 일으켜서 다시 말하면 당시 공산정권을 시민들이 민주시위를 통해 끌어 내리고 그들의 선택에 의해 서독에 편입되길 희망했고 그 과정에서 그 짧은 시기에 그 어려운 과제를 감당할 수 있었던 독일의 저력에 우리는 놀라고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할 때마다 우리가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압박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자: 독일 가기 전 생각과 도착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놀라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신덕수: 통일은 이미 돼있는 상태였고 그들 자신도 통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나면서 그때그때 쫓기면서 결정을 내려가면서 사상 유래 없던 일을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통일이 그때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그 시기에 통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데 짧은 시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순조롭게 완성하는 모습에 놀랐고 또 통일 후 재통합, 내적통합 과정이 굉장히 어렵고 힘들고 경비도 많이 들고 했지만 잘 감당하는 점에 또 한 번 놀랐죠.
기자: 빠르게 통일을 완성했다고 하셨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린 겁니까?
신덕수: 당시 이미 통일은 법적으로 완성이 됐고 동독 즉 독일민주공화국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즉 동독 의회가 결의를 해서 우리 동독 공화국은 오늘로 종원 한다며 스스로 해체했습니다. 쉽게 말해 멸망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결정해서 서독연방에 가입을 한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 1989년 11 9일인데 11월 13일 호네커의 후임으로 임명된 크렌츠가 한 달여 만에 물러나면서 동독 공산 정부 인사들이 전부 퇴진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이 민주 선거를 하기 위한 과도내각이었습니다. 11월부터 다음해 90년 3월까지 선거하는 과도 내각이었습니다. 선거 기간 중에는 서독 쪽 각 정당들이 동독에 세워준 기민당, 기사당, 사민당, 녹색당 등 동독에 같은 정당들이 섰습니다.
기자: 독일의 통일처럼 남북이 통일 된다면 현 북한 지도부의 거취는 어떻게 될까요? 동독의 경우를 말씀해 주십시오.
신덕수: 동독의 경우는 수상으로부터 말단까지 다 퇴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독에서 모든 행정인력은 즉 지도인력은 파견이 됐고 하부인력만 동독 사람이 맡았습니다. 그렇게 비유한다면 (북한의)주요직들이 다 퇴진한다고 볼 수 있죠.
남한정부가 도이칠란트에 파견한 신덕수 통일 사무관은 그곳에서 도이칠란트 통일과 민족 통합에 관여한 여러 사람을 만나며 한반도 통일에 어떻게 접목 시킬지 연구 분석하게 됩니다.
신덕수: 서독에서 통일의 주역이었던 담당자, 실무자, 정책 결정자들을 폭 넓게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동독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대표적으로 마지막 동독 총리인 드네지오 총리는 제가 4차례나 만났습니다. 재밌는 것은 제가 처음 드네지오 총리를 만났을 때 그가 하는 말이 신 선생이 날 찾아왔는데 이미 북한 정부 사람들과 대만 사람들이 벌써 다녀갔습니다. 어떻게 동독이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했는지 물었죠.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동독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가장 앞서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40년을 사회주의 국가에 우뚝 서면서 서독과 경쟁했고 어떤 면에서는 소련보다 앞서는 사회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쓰면서 소련 스스로 구 공산 체제를 해체하고 연방 주변 국가들을 독립시켰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공산주의를 버리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정치체제도 대통령제가 되면서 민주체제로 갔습니다. 그때를 기해 소련을 둘러싸고 있는 독일 이동, 독일 동쪽 거의 모든 나라들이 소위 개혁개방과 체제 전환을 이뤄가던 때였습니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소련은 동독에게도 권했지만 동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리식대로ㅓ 사회주의를 견고히 지킨다고 사회주의 40년 축제를 하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 된 것에 대한 구동독 시민의 반응은 어땠으며 정치인들은 어떻게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유권자를 설득했는지에 대해서도 신덕수 전 통일 사무관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신덕수: 동독 사람들이 이것은 아니다 해서 시민 민주혁명을 통해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민주 선거를 해서 새로운 민주 정권을 새운 바탕에서 통일 협상을 할 때 그 이전 시위 과정에서 또 새 정부 들어서 서독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도 일부에서는 우리 사회주의 국가 나름 보존할 가치가 있고 또 자존심도 있고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동서독이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해서 새로운 헌법 하에서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서독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동서독이 통일 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여론은 대등한 통일을 논할 필요가 없다 자기들이 추구했던 사회복지국가를 이미 서독이 건설했으니 우리 동독은 전부 버리고 서독에 가입하면 되는 것이지 동독이 간직할 것이 뭐가 있는가?
기자: 그것이 동독의 전반적인 민심이었습니까?
신덕수: 주류였습니다. 반론은 영향력을 못 끼친 겁니다. 워낙 전체 주장이 강하고 하니까 통일을 신속하게 하면서 부작용이 적게 하고 동독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에서 통일 한다면 도리 없이 서독으로 가입하는 방법이 가능했던 것이죠. 그 과정에서 선거를 하면서 정치인들은 당시 기민당은 통일 하면 단기간 내에 여러분을 서독 수준에 근접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고 서독 사람에겐 통일 하면 세금 부담이 커질 것인데 걱정 마십시오. 정부 능력으로 여러분에게 특별한 부담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라며 하면서 양쪽에 장밋빛 환상 한쪽은 걱정을 덜어주는 공약을 했죠. 그래서 통일 후 바로 그렇게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양쪽은 실망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죠.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오늘은 도이칠란트 통일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