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사람값이 없어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주민 중 한 부류가 국군포로와 그 가족입니다. 주로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일생을 보내는데요. 북한주민도 잘 모른다는 국군포로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순희: 지금 자식들도 할아버지가 표로돼서 역적의 아들이니까 북한 22호 수용소에 가서 소식이 없어요. 이 사람들은 평생 2대 3대까지 감시 대상이라 손주까지 그리 됐어요.
남과 북은 포로송환과 관련해 김대중 전 남한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06년 6.15일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1년 후 남한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64명이 전원 북한으로 갑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는 국군포로 송환과 대우에 관한 법률이 있습니다. 북한전문가 이훈 씨입니다.
이훈: 국군포로 대우에 관한 법률로 명칭을 붙였던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 때문에 국군포로 자체를 정부에서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어요. 북한에서도 우리는 국군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했고요. 그러면서 국군포로가 넘어오더라도 이슈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냥 신문에 짧은 몇 줄짜리 기사로 나갔어요. 국군포로 누가 귀환했다 이렇게 끝내고 말았죠.,
국군포로 귀환 1호는 탈북해서 1994년 남한으로 간 조창호 소위입니다. 2013년 고인이 된 조창호 씨는 남한에 가서 중위로 전역 했고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가 수 백 명이 된다고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장진한, 양순용, 장수환 씨 등 16명이 탈북해 남한에 가면서 정부는 1999년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른 겁니다.
이훈: 조창호 중위를 포함해서 양순용 씨의 증언을 조사해서 분류하는데 일단 명단을 작성해요. 이름만 가지고 하진 않고 여러 자료를 가지고 중복성을 찾는 거죠. 참 희한한 것은 그분들이 연세가 고령인데도 군번을 다 기억해요.
당시 국방부는 260 여명에서 500여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포로송환이 이뤄질 때 북한에는 국군포로가 한 명도 없다는 주장을 꺾지 않았습니다.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요.
이훈: 국군포로들이 거기서 왜 다들 결혼해서 살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북한체제 재건을 위한 방책이었던 겁니다. 그 당시 북한은 국군포로는 없고 북한에 귀화했다고 했습니다. 실제 북한에서 광산이나 외곽에 소개시키면서 현지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어요. 노동력이 필요했고 남자들이 필요했고요. 그런 과정을 겪은 겁니다.
탈북해서 남한에 간 귀환 국군포로들은 자신은 북한에서 탄광노동자로 그리고 도로보수 건설사업 등에 투입돼 일했다고 합니다. 북한주민들은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탈북여성 고진화 씨입니다.
고진화: 그때는 국군포로에 대해 잘 모르고 출신성분이 나쁜 남조선 괴뢰 앞잡이라고 대상하질 않았죠. 사람 가치를 우린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지나가면 손가락질 하고 침을 뱉었죠.
자신의 마을에는 국군포로가 없었는데 지나가면서 침을 뱉었다는 말은 무슨 얘긴지?
고진화: 예술축전을 하면 우리가 은덕에 가서 공연 했거든요. 선생님이 탄광노동하는 사람들이 괴뢰군 앞잡이니까 눈 마주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훈련하다고 노동자들이 지나가면 침 뱉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국군포로 가족이더라고요.
고 씨는 남한에 가서야 자신이 손가락질 하며 멸시했던 주민이 어떤 이유로 탄광일을 하며 힘들게 살고 있는지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젠 같은 탈북자로서 남한주민으로 살기에 이런 말도 전합니다.
고진화: 정부에서 미국에서 하는 것처럼 병사 유해를 발굴해 송환했으면 좋겠어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북한에서 억울하게 희생했는데 그분들을 모셔와야죠. 남한에 와서 국군포로 가족을 만나보니 우리가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이 나라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의 자식들이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또 다른 탈북여성 김순희 씨입니다. 그는 국군포로는 특별한 꼬리표가 붙은 감시대상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김순희: 43호라는 것은 국군포로에 대해 감시대상자로 명시를 해놨어요. 저희들은 북한에서 살 때는 국군포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사람취급을 안 해요. 국군포로 자체를 남한에 없다고 했기 때문에 함부로 발설 안하잖아요. 우리도 몰랐어요. 그 사람들 몽땅 탄광에 몰아넣고 일반에 취직을 못해요.
이렇게 국군포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현재 남한에서 만난 남편이 국군포로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탈북자들보다 자신이 북한에서 한 행동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순희: 당연히 우리같은 사람들은 미안하죠. 저는 북한사회주의 체제에서 남편하고 신분자체가 틀리니까 이 사람들은 사람대접을 못받고 짐승 취급을 해요. 여기서 만나보니 국군포로 자녀가 거의 180세대 200세대가 되는데 아버지 때문에 군대도 못가고 대학도 못가고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이 탄광일을 하고 결혼도 국군포로 출신과 해야하고요.
국군포로는 남한에 가면 정부가 탈북자에게 지급하는 정착금과 함께 특별 보상금을 받습니다. 이는 “국군포로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겁니다.
이훈: 국군포로는 군복무를 현재까지 계속 했다면 계급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계산을 해서 밀린 급여를 주는 겁니다.
이훈 씨는 국군포로의 귀환과 관련한 법률이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훈: 사실 이분들에게 잘해줘야 하는 이유는 전쟁은 없어야겠지만 이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후손들도 국가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되면 똑같이 이렇게 국가가 나에게 대접을 해주겠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시간이 흐르면서 탈북해 고향땅을 밟게 됐다는 국군포로 귀환자의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입니다.
도희윤: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생존해 계신다면 연령대가 거의 80살이 넘습니다. 북한의 남자 평균 수명이 60-65살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거의 15년을 더 사셔서 생존해 계신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영양상태도 안 좋고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감옥 아닌 감옥에서 사신다는 것이 너무 어렵죠. 이런 것으로 볼 때 생존해 계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저희가 2010년경에 83명 정도의 국군포로가 남한에 계셨는데 그 이후에 북한에서 이분들에 대해 관리를 철저히 했습니다.
북한이 확인해 주지 않는 한 아직 국군포로 생존자가 있다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포로의 자녀들은 현재 일하는 탄광에서 계속 일해야 할 것입니다. 도 희윤 대표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유해송환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도희윤: 국군포로 귀환은 생환과 유해 두 가지로 나뉜 상태인데 유해는 법률에 없다보니 나라에서 보상을 하자고 해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에 관한 법률제정을 정부와 민간관련 단체들이 지혜를 모아 법 제정에 대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고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와 관련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