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자신은 물론 손자까지 3대가 강제노동에 동원됩니다. 당원이 될 수 없음은 물론 평생 감시대상자로 분류돼 참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국군포로의 아들로 북한에서 살다가 지난 2004년 남한에 간 민중혁(가명)씨를 통해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민중혁: 태어나긴 지금의 샛별군이고 옛날에는 경원군에서 태어났고 70년대 초반에 아버지 따라 온성탄광으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중국 넘기 전까지 생활했습니다.
함경북도 온성군 상화탄광에서 채탄공 살았던 민 씨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입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아버지가 남한의 수도사단 기갑연대 하사로 복무 했다고 말합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보름 앞두고 중공군에 포로가 돼서 그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하는데요. 민 씨는 17살이 돼서야 자신의 출신성분을 알게 됩니다.
민중혁: 몰랐지요. 1975년도에 판문점에서 북한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동창들이 모두 군대 나갔는데 왜 난 못나갔는가 의문스러웠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국군포로기 때문에 군에 못가는 구나 알았습니다. 43호라고 역적입니다. 유사시 우리에게 총구를 드리댄다고 유사시에는 죽어야 한다고 낙인을 찍어둔 겁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이 그 말을 해서 알았습니다.
기자: 그전에는 전혀 몰랐군요?
민중혁: 네,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왜 어머니가 아버지를 천대하고 경계했는지 몰랐습니다.
기자: 어머니는 신분이 좋았습니까?
민중혁: 네, 좋았습니다. 정전이 되면서 여성들을 탄광광산에 취업시키면서 강제결혼을 시킨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정전이 금방 되면서 출신성분을 안 봤으니까요. 20살에 저희 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몇 만 명의 국군포로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 해서 북한당국이 생각해 낸 것이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 씨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한 출신인 것을 모르고 결혼을 했고 사실을 알고부터는 외가의 반대가 심해 결국 이혼까지 강요당합니다.
국군포로는 6.25때 인민군에 포로가 되어 53년 포로교환 당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에 남게 된 사람들입니다. 민 씨의 가족은 경원군 하면탄광에서 일하다 60년대 초반에 하면탄광이 폐광되면서 온성군 상화탄광으로 이송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탄광에서 일하게 된 겁니다.
민중혁: 8시간 노동제입니다. 3교대 일하는 데 낮과 저녁 그리고 밤 12시부터 아침까지 작업하는 교대제입니다. 같이 일을 해도 우리같은 사람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그 사람은 간부 추천을 받거나 감사장을 받는데 우린 그렇지 못하거든요.
기자: 8시간 막장에 들어가면 계속 갱도 안에 있어야 합니까?
민중혁: 네, 8시간이 넘어 보통 12시간 있는데 밥도 거기서 먹고 합니다.
기자: 식사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민중혁: 보통 도시락을 싸 가는데 탄광일이 힘드니까 김일성이 80년대부터 탄광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비행사 대우를 해준다고 말로는 많이 떠들었는데 대우는 받지 못했습니다. 도시락을 싸가고 탄광 내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양제 식당이란 데에서 국을 끓여서 여성들이 갱으로 가져오죠. 탄광 안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니는데 비가 오는 것처럼 먼지가 뿌옇습니다. 그 속에서 밥을 먹죠. 새까만 밥을 먹는 겁니다.
힘든 노동에도 불구하고 딱히 특별한 배식은 없습니다. 민 씨가 유일하게 생각해 낸 것은 이겁니다.
민중혁: 소주를 주는데 잘 먹으면 한 달에 한 번 평균 두 달에 한 번 줍니다. 배급은 한 사람당 900g인데 이것저것 떼면 800g이 안됩니다.
기자: 배급은 뭘 줍니까?
민중혁: 80년대 넘어서면서 탄광광산 사람들에게 백미를 주라고 해서 채탄공, 굴진공에게는 입쌀을 줬습니다. 하지만 풍족하진 못합니다. 그 전에는 5:5로 백미 아니면 잡곡 그도 아니면 감자로 줬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같은 신분은 아니고 그 안에서도 부류가 나눠집니다.
민중혁: 1967년도에 평양에서 신분이 나쁜 사람을 몽땅 지방으로 추방했는데 그때 온 사람이 많았고 제대군인도 많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희들을 많이 괄시했습니다.
기자: 그 사람들은 국군포로 자녀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민중혁: 알죠, 왜 모르겠습니까? 입당하기 위해 정말 제가 열심히 일했는데 비서들이 저는 괴뢰군 세끼이기 때문에 감시대상이며 입당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1년이 지나서 현실을 알았습니다.
기자: 채탄공으로 일하면서 1년 뒤 현실을 알게 됐다는 거군요
민중혁: 네, 현실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70일 전투할 때도 열심히 일했는데 괴로군 세끼 딱지가 붙어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겠다고 입당하겠다고 열심히 했습니다. 아버지는 괴뢰군이지만 자식은 김일성을 위해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열심히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기자: 탄광에 국군포로 자녀가 많았습니까?
민중혁: 네, 많았습니다. 죽은 사람도 많고요
기자: 탄광에 국군포로 가족이 얼마나 됐습니까?
민중혁: 전체가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이 500여명이라면 한 100명이 국군포로 가족이었습니다.
탄광에서는 언제든 사고의 위험을 안고 일하기 때문에 한순간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민중혁: 탄광이 전기공급이 안돼서 물에 잠기는 일이 많습니다. 전기가 공급돼야 물을 빼는 데 전기가 없어 물에 잠기는 일이 많죠.
기자: 막장까지 깊이가 어떻게 됩니까?
민중혁: 제가 일한 곳은 수직으로 500에서 깊은 곳은 900까지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공기가 들어가고 그 바람이 배기구멍을 통해 빠집니다. 갱안에 선풍기가 있어서 가스를 뺍니다. 석탄을 켜려면 공기공급이 잘돼야 합니다.
자: 한 번 들어가면 몇 명 정도가 들어갑니까?
민중혁: 우리 조는 25명 정도인데 여러 조가 들어갑니다. 사고가 많았습니다. 폭발사고도 있고 우리 일하는 데선 18명이 질식사고로 죽었습니다.
민 씨는 고난의 행군 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 남한행으로 이어져 현재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민중혁: 내가 왜 북한에서 태어나 괴뢰군 세끼로 살았을까 후회가 됩니다. 내가 남한에서 났다면 잘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버지 고향에 가보라고 유언이었는데 지금은 지옥에 있다가 천국에 온 기분이고 가고 싶은 곳에도 가고요 좋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43호로 분류된 국군포로 가족의 생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