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억류자 51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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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북이산가족상봉행사가 있을 때면 유난히 더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한에 있는 납북자 피해 가족들입니다. 북한당국은 납북자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남측 가족들은 최소한 북한에 억류된 부모 형제의 생사 확인만이라도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오늘은 전후 납북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종관 이사.
김종관 이사.

남한의 ‘전후납북자피해가족협의회’에서 주장하는 미송환자는 516명입니다.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된 후 현재까지 북한에 억류돼 있다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한 남측 피해가족은 아직까지 북한에 억류된 가족의 생사확인 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젠 눈물마저 말라버린 상태라고 말합니다.

남북이 휴전협정을 맺은 다음 발생한 또 다른 형태의 이산가족. 전후납북자피해가족협의회 김종관 이사의 설명을 들어보죠.

김종관: 전후 납북자라 함은 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 군사정전협정 이후 생업에 종사하다가 북한에 강제 납북된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기자: 북한에 납치됐다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귀화 또는 자진월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김종관: 북한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남한 사람이 3,835명이 납북됐습니다. 그중에 1년 이내 송환자가 3,310명으로 아직 미송환자가 516명입니다. 이들 중 95% 어부들입니다. 어선이 통째로 납북됐다는 겁니다. 한두 사람이 자진 월북했다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배가 수 십 척이 납북됐는데 자진 월북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기자: 납북자는 어부, 민항기 탑승자, 군인경찰 이렇게 세 부류인가요?

김종관: 그렇습니다. 세 부류인데 그때 당시 어선은 요즘 말하는 위성항법장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남방한계선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는데 북한 선박이 와서는 데려가면 무조건 끌려가는 겁니다. 그리고 민항기 피랍은 1대였고 나머지 군경 합쳐서 30명 정도 됩니다.

남측에서 발간된 통일백서에 따르면 북한에 의해 피랍된 남측 주민은 대부분이 어부들로 1955년 5월 대성호 선원 10명이 피랍된 것으로 시작으로 61년에서 66년 사이에는 매년 한두 척 어선이 나포됩니다. 그러다가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된 60년대 중후반에 가서는 남측 어부 352이명이 무더기로 납북됩니다.

김종관: 연도별로 보면 1955년부터 1995년까지 이뤄졌습니다. 그중 1968년에는 납북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송환자가 없었습니다. 68년에는 미군 푸에블로 군함이 북한에 의해 피랍됐고 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에 대한항공 민항기가 피랍됐습니다. 1967년부터 70년 사이에 납북됐던 분들은 대부분 송환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기자: 미송환자는 어떤 분들입니까?

김종관: 예를 들어 고령자와 그나마 남북관계가 냉전시대이지만 뭔가 합의하는 시기에 있고 이럴 때는 서로의 입장을 봐서 송환이 됐습니다. 그런데 경색관계에 있을 때는 송환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은 거기서 가정을 꾸리게 하고 송환해주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에 억류된 분들이 북한 어디에 사는 지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는 파악하고 계십니까?

김종관: 공식적으로 북한이 인정하는 몇 사람은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통해 만남이 이뤄진 적이 있지만 북한에서 납북자는 없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기자: 남한정부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김종관: 이런 부분이 답답합니다. 한국정부의 입장은 북한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하지 않는 한 송환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저희도 압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들어 남북화해 무드에서 비전향장기수였던 이인모 씨를 1993년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햇볕정책을 내세워 비전향장기수 63명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납북자 피해가족 측에서는 맞교환을 하자고 했지만 북한에서 납북자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해 단 한 명도 송환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납북자 피해 가족은 한때 자신들이 피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정부로부터 감시대상자로 분류된 바 있습니다.

김종관: 72년에 납북됐는데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납북된 상황에서 남은 가족은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당시 군사정부 시절에는 우리를 감시하고 공무원 시험도 못 보게 하고 취업도 제한하고 선원증이나 비자발급이 안 돼서 외국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기자: 어떤 이유에서 정부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나요?

김종관: 당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고 나서 박정희 정권에서 혹시 납북된 사람들이 교육을 받아서 남파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감시하고 그랬던 것으로 압니다.

기자: 이제는 연좌제 폐지로 그런 피해는 없는 상태죠?

김종관: 네,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풀린 것은 김영상 정부에서 모든 연좌제와 관련한 서류를 폐기해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2007년 납북자가족협의회는 사단법인 창립총회를 가졌고 3년 뒤 납북피해자가족은 통합형태를 거친 후 ‘전후납북자피해가족협의회’란 이름으로 정식 등록됩니다.

기자: 법정단체와 그전과는 어떻게 달라진 겁니까?

김종관: 그전에는 국가에 어떤 피해보상이나 단체활동에 대한 지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법정단체가 되고 나서는 매년 적지만 국가로부터 우리 미망인을 위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 돈으로 긴급의료지원, 생계지원 등을 하고 있습니다.

피해가족협의회 김종관 이사는 1972년 나포된 남한 쌍끌이 어선 안영호에 어부인 김달영 씨의 아들로 현재 아버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여든이 넘었다며 그리운 아버님을 불러봅니다.

김종관: 아버님 저 큰아들 김종관입니다. 72년도에 아버님이 납북됐는데 당시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울고만 있는 어머님을 향해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지도 못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50살이 넘어 대학생 자녀 두 명을 둔 아버지가 됐습니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져 아버지의 생사확인이라고 이뤄지길 바라고

살아계신다면 꼭 뵙고 싶습니다. 살아계신다면 몸 건강하시게 계시고 아버지 얼굴 그립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에 억류된 납북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