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1969년 남한의 민간항공기 한 대가 남파간첩에 의해 북으로 피랍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남한정부는 물론 국제사회는 북한정부에 대해 불법으로 압류한 항공기와 승객 전원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지만 문제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1969년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 황인철 씨를 통해 풀리지 않은 피랍사건 알아보겠습니다.
황인철: 저희 아버지 이름은 황원이고 저는 큰아들 황인철 입니다. 46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우리가족에게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거든요.
남한의 대한항공 쌍발여객기 한 대가 강원도 강릉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북한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착륙한 사건입니다. 당시 남한 언론에서 북한은 이 사건을 정치적 흥정대상으로 삼으려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납북 66일만에 승객 일부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납치 피해자 가족 황인철 씨입니다.
황인철: 제 나이 2살 때 아버지가 MBC 방송국 PD이셨는데 출장을 가시기 위해 1969년 12월 11일 정오 12시 25분에 탑승하시게 됐고 이륙 후 10분 만에 북한의 고정간첩에 의해 납치된 사건입니다. 탑승자는 승무원 4명(기장, 부기장, 스튜어디스) 그리고 승객이 고정간첩 1명 빼고 46명으로 총 50명이었습니다. 민간항공기 불법납치 행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인도와 기소를 이행해야 합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치니까 북한은 1970년 2월 4일 전원 송환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돌연 약속을 어기고 2월 14일 승객 중 부분 송환, 39명만 송환합니다. 송환된 39명의 증언을 통해 왜 저의 아버지를 포함 11명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밝혀지게 됐고 그러면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납치가 됐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기자: 북한에서 11명을 억류한 명분은 뭔가요?
황인철: 송환된 39명의 증언에 의하면 저의 아버지는 언론이었고 상식적으로 국제법과 국제인도법에 의해 반드시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상교육 시간에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가 2주 후에 데려왔답니다. 1970년 1월 1일에 ‘가고파’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답니다. 그 후로 송환된 39명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이 주장한 것은 자의에 의해 북한에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월에 국제적십자워원회가 11명의 송환을 또 북한에 요구했습니다. 왜냐면 39명 송환자에 의해 강제억류 정황이 나오게 되니까 돌아오지 못한 11명을 송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북한은 자신들이 원해 북한에 머무는 것이라고 했고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제3국에서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북한은 본 사안은 공화국의 사안이므로 국제적십자사는 이 문제에서 손을 떼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기자: 당시 자신의 의사를 밝힌 것이 아니라 북한당국의 일방적 통보였다는 건가요?
황인철: 그렇습니다. 자유의사를 밝힌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못하게 북한당국이 막아버린 것이죠.
당시 남한으로 송환되지 않은 사람의 직업을 보면 방송국 피디와 카메라 기사, 강릉합동인쇄소 대표, 의사, 비행기 기장과 부기장을 포함한 승무원 등입니다. 남측은 강제 억류라고 말하는 반면 북한이 주장하는 것은 자진월북입니다.
황인철: 당시 1960년은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다는 것이 정설인데 이런 것으로 말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월북이라고요. 하지만 기장과 부기장은 일반인 월급이 5천원일 때 이분들은 십 만 원대고 저희 아버지도 몇 만 원대였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거기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효자 소릴 들었던 분이고 저희를 예뻐하셨다고 했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저희 아버지를 포함 11명이 북한에 강제 억류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북한의 또 다른 주장은 간첩활동입니다. 그렇다면 탑승객들은 46년 전 무슨 일로 비행기를 탔던 것일까?
황인철: 그때는 영동고속도로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강릉에서 춘천 간다 하면 교통편이 좋지만 당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김포까지 와서 김포에서 춘천으로 가는 것이 빨랐습니다. 경춘 고속도로를 타는 거죠. 그래서 결혼식 참석차 탑승한 분들이 많았죠. 강원도 산이 꼬불꼬불해서 차로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해서 비행기를 탄 거죠.
이러한 사정 이야기는 66일동안 북한에 억류 됐다가 남한으로 돌아간 승객들이 밝힌 내용입니다. 당시 송환 후 기자회견 증언을 보면 승객으로 가장한 고정간첩 조창희가 이륙 후 기장실로 들어가 권총으로 기장 유병하 씨를 협박했고 비행기 피랍 후 함흥을 거쳐 평양으로 이송된 뒤 집단 또는 개인별로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또 북한 측에 비협조적인 승객들은 전기 고문이나 약물 고문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기자: 한국 정부의 억류된 분들의 송환을 위한 노력은 무엇이었습니까?
황인철: 한국정부가 당시 송환을 위한 노력을 했을 겁니다. 1970년 7월 초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제 17차 특별총회 결의에서 불법적으로 압류된 항공기, 승무원과 승객을 본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촉구했고 70년 9월9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제 286호는 납치 및 국제항로 방해로 인해 억류된 모든 승객과 승무원이 예외 없이 즉각 송환돼야 한다고 했고 70년 제 25차 유엔총회에서 ‘항공기 불법 탈취에 관한 규탄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그 때 상황에서 많은 분들이 노력을 했는데 그 후로 잠잠해 지면서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겁니다.
황인철 씨가 아버지를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을 때지만 아버지와 자신을 이어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황인철: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가 계셨고 내가 있었고요.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셨습니다. 효자이셨고 본인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 분이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시고 반면 자신의 고집도 세시고 해서 어릴 때 아버지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어린 시절 힘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기만 하고 상상한 것이지만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황인철 씨는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됐으며 딸 셋을 둔 한집안의 가장입니다. 북한에 억류된 그의 아버지 황원 씨는 1937년 생으로 생존해 있다면 올해 나이 78살이 됩니다.
황인철: 아버지, 진짜 보고 싶고 아버지 목소리 듣고 싶고 체온을 느끼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뵙고 싶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비행기를 타고 출장 갔던 아버지를 46년째 기다리는 아들 황인철 씨 사연을 중심으로 1969년 북한에 의한 민간항공기 피랍사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