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국 언론사에서 발표한 행동하는 지성인 100인에 선정된 탈북자가 있습니다. 10년 뒤에는 한국을 빛낼 사람들이라고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이 사람은 함경북도가 고향이지만 현재는 한국에 살면서 동의사로 일합니다. 남한정착 초기에는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북한에서의 직업인 동의사를 남한에서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탈북민 한의사 김지은 씨입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그 사연을 전하겠는데요.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나의 탈북은 피할 수 없었다" 편입니다.
김지은: 의사인데 왜 탈북했습니까? 괜찮은 직업이 아닌가요? 하고 질문하면 내 대답은 네, 제가 의사이기 때문에 탈북했습니다라고 답변합니다.
청진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한 김 씨는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청진시 포항구역 제2인민병원 소아과 입원실 의사로 일합니다. 당시 같이 근무하는 의사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20대 후반이었는데요. 김 씨는 의사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김지은: 저는 소아과 입원실 의사였어요.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단순한 질환으로 왔는데 그 아이들에게 링거 하나 놔 줄수 없고 그 때문에 생명이 경각에 이르게 한 책임이 간접적으로 내게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됐습니다. 내가 맡은 침상이 8개였는데 퇴근하면서는 내일 와서 어떤 아이 얼굴을 못보게 될까? 이런 생각도 했고요. 과연 나는 의료인으로서 나는 뭘까?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의사로서 내가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내가 감당해야하는 임무는 뭐고 행동은 뭘까? 죽어가는 내자식 끌어 안고 엉엉 우는 부모를 안고 같이 울어줄 수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거예요.

분명 의사로서 존재감을 상실한 것도 탈북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더 큰 문제는 당시 북한주민 모두가 경험했던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김지은: 개인적으로 배도 고프고요. 국가에서 주지 않으면 의사라고 해도 어렵거든요. 개인의 삶도 처참하다는 생각을 했고 당시 95년 중후반 북한 상황은 굉장히 혼란스러우면서 많은 사람들이 탈북하고 또 잡혀오고 했어요. 저는 그때까지 북한에서 살면서 탈북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 가정환경이 아버지가 장애인이었고 일용직 노동자였는데 그런 집안에서 내가 의학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의 큰 배려였고 이 제도가 좋기 때문에 내가 공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탈북한다는 생각은 못했죠. 그런데 여러가지 상황들이 나한테 중국이란 나라에 뭐가 있기에 저사람들이 붙잡혀 와서 강제노동을 하고도 또 저기를 가는 것일까? 나도 한 번 잠깐 중국에 나가볼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생활은 점점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고 더 이상 결심을 미룰 수 없게 되버립니다.
김지은: 떠나는 당일 6살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린이 집에 있었어요. 가서 손 흔들면서 엄마 잠깐 갔다올께 이렇게 말하고 며칠 후에 봐 이러고 청진을 떠나 무산에 갔습니다. 마음은 잠깐 중국이란 곳을 가보자 했지만 무거운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더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었고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오직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는 상태였어요.
기자: 마지막 북한을 떠난 것은 언제고 탈북을 위해 준비한 것은 있었습니까?
김지은: 전혀 없었고요. 저는 99년 3월 두만강을 넘었어요.
기자: 그래도 6살된 아들을 놔두고서…데리고 가지 않고요?
김지은: 잠깐 갔다가 올꺼니까요.
기자: 그때는 사실 탈북은 아니네요.
김지은: 네, 탈북은 아니었고 중국에 잠깐…사람들이 들랑날랑 하니까 분명 저기 뭔가 있나보다 나도 한 번 가볼까? 이런 생각으로 두만강을 가만히 넘었으니까요.
중국에는 아버지 형제와 친지들이 많았기 때문에 잠시 가서 방조를 받아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고 아들과 헤어졌지만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면서 앞으로 돌일킬 수 없는 일을 벌렸구나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김지은: 두만강을 넘으려고 발을 내딛을 때 이미 그런 생각을 했죠. 그때 북한에 있을 때 마음이 답답하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일단 떠났고 두만강 앞에 서니까 여기를 넘어가는 도중에 사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아직 젊었는데 북한 땅에 앉아 죽는 것보다 뭔가 노력을 하다가 죽는 것이 낫겠다 이런 생각을 했고요. 여기를 뛰어서 건너갈 때 죽을 수도 붙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죽기 살기로 뛰어서 넘어갔어요.
중국에서의 생활은 참 운이 좋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안락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번이나 공안에 체포돼 북송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김 씨는 결국 2002년 한국에 도착합니다. 한국행은 두만강을 건널 때와는 또 다른 각오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김지은: 제가 중국에 3년 살면서 여러가지 일을 했는데 먹고사는 일 이외에 한 일은 한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었어요. 신문, 잡지 손에 잡히는데로 읽었고요. 나중에 북경에 살면서 한국 문화원에 가기 시작했어요. 조선족 신분증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내가 북한 사람인 것을 몰랐어요.
한국문화원에 다니면서 한국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신문도 조.중.동이 다 있어서 아침에 가서 저녁에 거기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본거예요. 신문을 6개월 동안 본 것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북한에서)생각하는 한국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한국에 가면 북한에서처럼 동의사를 하고자 했는데 당시 한국의 법은 남한입국 탈북자를 위한 것이 아닌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을 위해 만들어져서 김지은 씨의 경우를 구제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즉 자격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김지은: 통일부에서 북한학력확인 인정을 받았고 교육부에 한국 한의대 6년 졸업한 자와 동등한 자격을 받았어요. 그러면 한국 학생은 국가고시를 칠수 있는 자격을 받는데 저는 안된다는 거예요. 왜 안되냐고 했더니 북한에서 소지한 서류를 가져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대학에 편입하래요. 그래서 대학에 갔더니 대학에서는 한국은 한 사람이 같은 전공을 두 번 할 수 없데요. 내가 이미 교육부에서 한국 한의대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한의대 입학이 안됩니다 이러는 거예요.
첫번쩨 좌절을 맛본 김 씨는 당장 살길을 찾지만 완전히 달라진 생활환경은 실타레처럼 뒤엉키고 맙니다. 남북한 문화차이에서 오는 건데요. 그중 하나는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에 자신을 끼워 넣기가 힘들었던 거죠.
김지은: 당연히 혼란 스러웠죠. 뭔가 열심히 살지만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기 사람들이 굉장히 열심히 살잖아요. 출근도 빠르고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가면 굉장히 열심히 살지만 결국 삶은 거기서 거기더라. 저는 열심히 살면 굉장한 부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부라는 것이 그냥 열심히 산다고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내가 기준으로 한 부란 것이 현실과는 굉장히 멀구나.
한의사 일도 할 수 없고 직업도 찾기 쉽지 않고 남한사람들과 경쟁을 해서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에서 두번 붙잡히면서도 북송을 당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거죠.
김지은: 그때 제가 자살을 생각했어요. 유서를 썼죠. 더는 희망이 없다. 자살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겠는데요. 자기 지나온 삶이 정말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죽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요. 그때 저도 그런 환경이었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죽겠다는 결심을 하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김지은 씨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는 여러분은 벌써 아시죠. 살아있으니 이렇게 여러분께 사연을 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 나는 김지은이니까" 편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 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