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간에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김조 실록'편찬 조에서 봤던 자료들 중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북한에는 리규호라는 이발사가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고객은 단 두 사람, 김일성, 김정일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리규호는 일제 때부터 동네 이발소를 운영해 온 사람입니다. 그 동네에서는 그를 "깍아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해방 후 어느 날 김일성이 회의를 위해 지방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던 중 그의 이발소에 들렸던 것입니다. 젊은 이발사의 정성에 감동한 김일성은 그때부터 머리를 다듬을 기회가 있으면 리규호를 자기 저택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나중엔 아예 저택 이발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첫 날 리규호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가장 가까웠던 동지였던 최현장군이 초면의 이발사에게 "당신의 면도칼이 김일성의 목에 작은 흠집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벌 둥지를 만들겠다."며 협박했습니다. 그런 다음 권총을 거울 앞에 놓고 자기부터 면도를 해보라고 욱박질렀습니다.
이후에도 최현은 면도칼을 쥔 이발사는 순종부터 배워야 한다며 온갖 험한 시험을 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늘 침착하고 한결같은 이발사의 정성에 탄복한 최현은 나중엔 리규호를 동생처럼 아끼게 되었습니다. 최현은 6.25전쟁 후 민족보위성 부상이 된 다음에도 김일성을 만나러 갈 때에는 '이발하러 가겠습니다.'하고 전화했다곤 합니다. 가끔 막내아들인 최룡해도 데려가곤 했는데 김정일과 최룡해와의 인연은 그렇듯 단순히 소꿉친구가 아닌 아버지들로부터 계승된 것이었습니다.
리규호의 덕을 크게 본 사람은 김일성보다 김정일이었습니다. 초기 김정일의 당선전 선동부 지도 사진을 보면 바투 올려 깍은 머리였습니다. 젊은 지도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김정일이 요구했던 머리였습니다. 보다 못해 리규호는 김정일에게 '나이가 젊었는데 머리로 또 강조하면 강해 보인다며 파마머리를 추천했습니다. 젊음보다 권위를 강조하고, 보다는 키가 커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작은 키가 단점이라고 항상 신경 쓰였던 김정일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때부터 김정일은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파마머리로 지내게 됐습니다.
말년에 김정일이 중병을 앓아서 머리가 빠진 것도 있지만, 보다는 평생을 파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 만수무강연구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연약재를 이용한 파마 약 개발 연구가 80년대 초반부터 김정일 사망할 때까지 계속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자기의 작은 키 단점을 보완해준 파마머리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또 그 자부심만큼이나 리규호에 대한 사랑도 극진했습니다. 2000년 경 노동신문이 연 이틀 동안이나 평범한 이발사 리규호와 그 가족에 베풀어 준 김정일의 '인민 애'를 선전했었습니다. 그 기사 내용을 보면 김정일이 어느 날 리규호에게 '자식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자 리규호가 '솔직히 말씀 드린다면 아버지가 깍아쟁이라며 애들이 놀려 줘서 부끄러워 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정일이 즉석에서 당 선전선동부 과장을 불러 우리 사회에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냐며 이발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지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실제로 '김조 실록' 자료를 보면 리규호가 '애들이 놀려줘서 딸이 울었지만, 그 애들도 이 리규호가 수령님, 지도자동지를 모시는 이발사인 줄 알면 엄청 부러워했을 것'이라는 회고 내용이 있습니다. 김정일은 그 날로 조선예술 영화촬영소로 갔고, 북한영화 '처녀이발사'의 첫 시연회를 리규호의 생일선물에 맞춰 완성하도록 합니다.
또한 그때부터 당 중앙 간부문건도 바뀌게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 중앙 근무인력들의 모든 문건에는 정확한 직업이 표기돼있었습니다. 리규호도 중앙당재정경리부 이발사로 돼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간부문건에서 직업표기를 없애고, 지도원, 과장, 부부장, 이런 식의 직급표기만을 하도록 했습니다. 김정일은 리규호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히틀러가 가장 무서워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는가? 이발사였다. 그런데 나는 리규호 동지가 제일 좋다.'고 말입니다. 김정일이 리규호를 더욱 신임하게 된 계기 중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장성택이 리규호를 불러 이발 하는 시간에 김정일에게 전달해달라는 청탁을 하나 했다고 합니다. 몇 달 후 장성택이 김정일과의 독대에서 이 사실을 고백하자 김정일은 즉석에서 리규호를 불러 일부러 엄한 말투로 왜 미리 말 안 했는가고 따졌다고 합니다. 리규호는 '저는 이발하는 사람입니다.
이발과 상관없는 이야기여서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다.'고 차분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리규호를 내보내고 난 김정일은 더욱 화가 나 장성택에게 '이발사보다 못한 놈'이라고 야단쳤고, 그때부터 김정일은 장성택을 조롱할 때마다 '머리 깍고 와!'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 내 권력질서와 환경이 김일성 주석체계와 김정일 당 조직비서 체계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김정일이 김일성 최측근 인물들 중 유일하게 데리고 간 사람이 이발사 리규호 였습니다. 매일 면도칼을 쥔 리규호에게 자기 목을 맡겨야 하는 처지여선지 김정일은 극진했습니다. 낚시대, 금시계, 양복, 등 고급외제 상품들과 호화 아파트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리규호의 맏아들은 북한 특권층 자녀들만 가는 스위스에 유학을 보냈고, 세 딸은 간부로 만들어주었습니다.
1981년 경 리규호는 김정일에게 자지해임을 제안합니다. 그 이유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손이 떨려 이발을 할 수 없다는 것 이였습니다. 김정일이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장을 추천했지만, 리규호는 자기는 무식한 이발쟁이라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장 직은 김일성 저택에서 리규호 이발사와 함께 목수로 근무했던 로명근이 임명되게 됩니다. 대신 김정일은 평생 이발사로 살아온 리규호의 인격을 존중해준다는 차원에서 북한의 최대 목욕탕인 '창광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합니다. 리규호가 뇌졸중으로 1992년 경 사망하자 김정일은 그에게 북한의 첫 '인민이발사'란 칭호를 주었습니다. 지금도 평양 창광원에 가면 초대원장이며 북한의 첫 '인민이발사'인 리규호 명예 원장의 약력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해방 전부터 사망까지 평생을 인민의 이발사로 살아온 리규호 동지'라고 씌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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