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북한의 비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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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노동당 통일 전선 부 대남 정책과 연락소 부원이었고 김정일을 두 차례나 접견한 일급작가 이었던 장진성 씨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60년 독재 체제와 현대판 봉건 세습에 대한 진실과 배경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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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12월 30일 근로자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답신 차원에서 보낸 '친필'.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얼마 전 김정은의 자필비준이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일인지배 정치를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김정일의 비준정치를 그대로 답습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이른바 비준제도가 생긴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김일성 주석권한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제한시키고 사실상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한 김정일은 유일비준을 통해 일인 지배 체제를 시작했습니다.

초기 비준제도 명목은 김일성의 업무 과부담을 덜기 위해 당 조직부가 선별하여 김정일 당 조직비서가 비준한 다음 당 총 비서에게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내각, 군, 정부의 모든 문건들은 해당 중앙당 상급부서들을 통해 당 조직부로 집중되도록 법제화했습니다. 예컨대 외무성은 당 국제부, 문화성은 당 선전 선동 부를 거쳐 당 조직부로 문건을 발송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관계로 제의서 작성과 준비, 마감에 이르기까지 중앙당 각 부서들은 관리 단위들에 대한 지도와 개입을 구체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 과정에 북한의 내각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됐고, 반면 당은 절대권력으로 급부상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당 조직부는 주요 간부들의 인사권은 물론, 당 지도 권한으로 각 부서들에서 모여진 문건들을 종합하여 보고하고, 그 결과를 추궁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문건의 집중화는 곧 김정일의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김일성은 1980년대 중반부터는 당 조직부의 제의서, 비준제도 장벽에 꽉 막혀 나라실정을 전혀 알 수 없는 눈먼 지도자로 전락됐습니다. 김일성이 그러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김정일이 모든 권력과 기능을 빠짐없이 장악한 뒤였습니다. 아래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여러 경로를 거쳐야 했고, 경호부대인 1호 호위총국마저 당 조직부에 소속돼 근접경호가 아니라 근접감시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일성이 배급제가 붕괴됐다는 사실을 알고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한 것은 소식의 충격보다 그 동안의 또 다른 심리적 원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김일성의 주석권한을 무력화시킨 김정일의 비준은 크게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장 상위등급은 ‘친필비준’입니다. ‘친필비준’이란 김정일이 제의서 내용을 자필로 일부 수정하거나 추가, 또는 강조한 다음 날짜와 이름을 적어 넣는 방식의 비준입니다.

이 ‘친필비준’은 지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라는 뜻으로서 강제성을 띠며 다른 제의서들에 비해 최우선 실행권한이 부여됩니다. 때문에 이 비준을 받은 제의서나 문건일 경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 결과를 다시 보고해야 합니다. 만약 지연되거나, 김정일이 결과에 불만족할 경우, 당 조직부는 당 지도권한으로 관련 간부들을 색출하여 엄벌하게 됩니다. 김정일의 두 번째 비준등급은 ‘존함비준’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자필 내용이 없이 날짜와 이름을 새겨 넣는 형식의 비준입니다. 이런 비준의 사안들은 김정일이 ‘친필비준’처럼 관심을 가졌다기 보다 그냥 허락했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래서 이런 비준 문건들은 강제성보다 시간제한에 관계없이 무 조건성을 가지며, 그 결과는 김정일이 아니라 당 조직부에 보고하도록 돼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날짜비준이 있습니다. 이런 비준에는 김정일의 자필이나, 이름은 없이 그냥 비준 당일 날짜만 표기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김정일이 보았다는 수준의 비준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준 문건이 내려올 경우 당 고위 간부들은 김정일이 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김정일 서기실의 보고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의 서기실은 당 서기실과 의례국 서기실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당 서기실은 제의서의 분야별, 중요도 순위에 따라 목차를 작성하고 문건들을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 조직부가 제의서 목차를 잘 만들어도 의례국 서기실이 김정일 집무실이나 특각, 또는 이동 중인 별장으로 보내는 직접 역할을 하기 때문에 권한이 더 막강합니다. 의례국 서기실이 김정일의 의중과 기분에 맞춰 제의서를 어느 시간과 어느 장소에 갖다 놓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틀려질 수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간부 상호유착을 막으면서도 경호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례국 서기실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도록 했습니다. 북한 당문헌 필름자료들을 보면 김정일이 제의서 문건 더미 속에 파묻힌 업무영상들이 있는데 그것은 선전용일 뿐입니다.

김정일은 단 한 장의 목차를 읽을 뿐이며 그 속에서 마음 드는 몇 가지만 골라보는 정도입니다. 운 좋게 김정일이 찾아본 문건들은 ‘친필비준’, ‘존함비준’이 되고 나머지는 날짜비준으로 자동 처리돼 버리게 됩니다. 그렇듯 국정운영의 개인주의로 북한에는 많은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1992년 경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의 초호화 200세대 아파트 입주사건이 바로 그 한 사례입니다.

그 아파트 입주문제와 관련하여 당, 군, 외무성, 대남공작부서들이 저마다 입주 제의서를 올렸는데 김정일이 동일하게 친필비준을 한 것입니다. 입주 당일 그 제의서를 가진 부서들의 이사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당 조직부가 중재에 나섰습니다. 서로가 ‘친필비준’을 보여주며 소유권을 주장하자 결국 당 조직부는 김정일의 자필 내용들을 따지기로 했습니다. 김정일의 친필비준 내용 중 “당장 해결해주시오,”가 최우선이었고, “빨리 해결해주시오”가 두 번째, “무조건 해결해주시오”는 언제든 해결하면 된다는 차원에서 다음 기회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김정일 개인의 비준 안에서 업무 추진과 평가를 받는 관계로 북한 당 부서장들은 제의서 작성의 귀재들입니다. 단 몇 글자의 제목에 내용이 집약되도록, 그리고 명명백백한 체계구성과 강조점들이 한 두 장의 문건에 모두 반영되도록 글자 하나, 점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제의서의 혼선을 피하고, 김정일의 비준 편의를 위해 당 부서들마다 보고날짜가 지정돼 있습니다. 화요일은 외무성, 군부, 수요일은 당선전선동부와 경제, 목요일은 내각, 사회단체 및 국내동향, 금요일은 당 대남공작부서들입니다. 토요일은 북한의 모든 직장들이 강연회, 학습, 생활총화 등 정치 날로 지정돼 있습니다. 김정일의 토요일은 당 조직부 보고만 받는 날이었습니다.

최근 김정은도 노동신문을 통해 김정일의 ‘친필비준’에 해당되는 상위 비준을 공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김정은의 비준에는 김정일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김정일은 결심의 경험과 연륜, 권력의 자신감이 있었지만 김정은은 하나부터 열까지 간부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의 결론으로 사인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 드린다면 경험의 부재가 권력의 분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간부들에게 책임의식과 권력공포를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준의 주체가 김정일 개인에서 장성택을 비롯한 김정일 최 측근 집단으로 이동했다는 자체가 사실 북한의 큰 변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