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통일전선사업부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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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북한에 있을 당시 통일전선사업부 101연락소 5국 19부 부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 이 시간에는 통일전선사업부의 실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선 흔히 당 대남공작부서들을 3호 청사라고 합니다. 그 3호 청사 유례부터 말씀 드린다면 6.25전쟁 이후 북한이 본격적으로 정권 재건에 돌입하면서 당 청사를 1호 청사라고 불렀는데 김일성이 대남공작부서들은 좀 숨어 있어야 한다며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승동으로 대남공작부서들을 밀집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여 1호 청사는 당 조직부와 선전부, 2호 청사는 내각을 관리하는 경제부서들, 전승동 당 대남공작부서들을 3호 청사로 부르게 됐던 것입니다.

통전부는 김일성이 고려연방제를 구상하던 1960년대 말에 만들어졌습니다. 김일성은 남북관계를 물리적 방법만이 아니라 당시 남한 내 민주화 세력을 이용한 흡수통일을 준비했고, 그렇게 '통일전선사업부'란 이름의 부서가 생겨나게 됐던 것입니다. 하여 통전부의 주 업무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한민전'형태였습니다. 평양시 중구역 오탄동 조국평화 통일서기국 청사 옆에는 '평양주재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란 간판의 건물이 있습니다. 이는 평양을 통일의 구심점으로 인정하는 남한 민주화 단체들이 평양에 대표부를 두고 대표들을 파견 상주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의 고려연방제란 이렇듯 연방제를 표방한 흡수통일이었고, 그것을 위해 북한은 두 가지 전략을 선택했었습니다. 하나는 남한 정권을 상대로 하는 물리적 방법, 다른 하나는 민주화 세력을 역이용한 적화통일이었습니다.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대통령을 노려 아웅산 테러 폭파사건을 감행한 것도 고려연방제의 상대가 될 수 있는 남한 내 민주정권 출범을 위한 강제적 방법이었습니다.

한편 북한은 대표적 민주인사들을 포섭하는 것과 동시에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친북통일운동으로 왜곡되도록 갖은 모략의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우선 제가 근무했던 101연락소는 1970년대부터 그 앞장에 섰던 대남문화연락소입니다. 6.25전쟁 때 월북작가들을 모체로 해서 만들어진 이 연락소에서는 남한 작가, 시인 명의로 민주화 운동을 친북통일운동으로 부추기는 소설, 시집들을 만들어 운동권에 침투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평양시 중구역 련화1동에 위치한 101연락소에는 813연락소가 한 마당을 쓰고 있는데 이는 101연락소가 만든 내용들을 남한 도서처럼 위장하기 위한 출판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한은 조총련을 통해 일본에서 종이들을 수입하여 활자도 남한 식으로 찍어 불온서적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101연락소 도서들은 일본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갔고, 그 책들은 운동권의 필수서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입직했던 1999년경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미 체제경쟁이 끝난 상황에서 설득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남심리전 기지들이 김씨 일가 신격화를 위한 대북심리전도 병행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노동신문과 TV들에서 소개되는 한국인 명의로 된 김씨 신격화물들은 모두 101연락소 5국인 문예편집국이 만드는 것입니다. 1999년 5월 22일자 노동신문에서 남조선 면을 가득 채웠던 한국의 민중시인 명의로 된 서사시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도 제가 만든 서사시였습니다. 그 서사시 공로로 저는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김정일은 "선군 시대의 통전부 모범작품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옆에는 26연락소도 있습니다. 북한이 1999년까지 지속했던 구국의 소리방송 기지입니다. 구국의 소리방송은 남한에 실존하는 방송국인 것처럼 위장하여 남한 운동권에 반미, 반 정부, 고려연방제를 선동하는 전파침투 연락소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칠보산 전자악단"으로 알고 있는 예술단이 바로 구국의 소리방송 소속 전자악단입니다. 칠보산 전자악단이란 명칭이 외부에 노출된 탓에 훗날 북극성으로 바뀌었고, 그 26연락소를 통전부 직원들의 전문용어로는 '개관연락소'라고 합니다. 전파침투에서 인터넷침투기지로 탈바꿈한 이 26연락소는 101과 마찬가지로 대북심리전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북한 TV들에서 가끔 남한 대학생들의 친북비밀운동을 소개하는데 그 출연자들은 다름아닌 북극성 전자악단 배우들입니다. 그 동영상 촬영과 편집은 101연락소 3국이 맡아 하고 있습니다. 통전부에서 유일하게 대남심리전만 전담하는 연락소는 310연락소입니다. 이 310연락소는 남한 내 실존하는 시민단체 명의를 도용한 글들을 인터넷으로 확산시켜 교란 전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잘 알려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에도 310연락소는 온갖 명칭을 도용하여 반미항쟁을 호소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전부는 남한 주민등록증을 도용하여 댓글 심리전, 대남심리전 기사들을 인터넷에 유포시키거나 남남갈등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탈북하던 2004년 당시에만도 통전부는 남한 주민등록증 번호 30만개를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체제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북한은 통전부의 전략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과거에는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적화공조세력으로 역이용하는 '한민전'중심의 흡수통일이었다면 지금은 대북지원 목적과 고려연방제 명분만 내세운 '범민련' 중심의 체제유지전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를테면 '고려연방제'란 구체성을 피하고 '범민족'이란 추상적인 용어를 더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과거에는 남한 내 동조세력을 노동자, 농민, 친북운동권 등의 세력으로 한정 지었다면 지금은 진보단체, 시민단체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교란과 심리전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통전부의 통일외교이며 공작의 주 목적입니다. 제가 탈북하기 전 2004년까지 통전부 부장직은 공석이었습니다. 당 조직부, 선전부, 국가보위부와 마찬가지로 중요 부서로 분류하고 부장직을 김정일이 대행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통전부장은 김양건이지만 2006년 경까지는 임동옥 제1부부장 직제로 운영됐습니다. 통전부에서 제2부부장은 반드시 조국평화통일서기국 위원장이 겸하게 돼 있습니다. 통전부 산하에는 각 연락소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당 통전부의 모든 음성적 기능들을 그대로 함축시켰기 때문입니다. 조국평화통일서기국은 북한의 대외적 통일외교 기관을 자처하며 회담, 교류와 같은 공개 기능을 수행합니다. 한편 그 명분으로 남한과의 접촉 과정에 포섭, 정보수집과 같은 공작도 겸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합적 이유로 통전부 직원들은 조국평화통일서기국을 "어머니연락소"라고 부릅니다. 제3의 인물은 아직까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통전부 음지에서 정책, 심리전을 총괄하는 채창국 부부장으로서 저의 최고상관이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