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간에는 신상균을 통해 들여다보는 김일성과 김정일과의 권력 갈등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신상균이라면 북한 주민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신상균은 김일성의 음식, 건강, 편의 등을 총괄 담당했던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 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김일성의 그림자로 그 옆을 지켜왔던 충신이었습니다. 신상균과 김일성의 인연은 해방 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신상균은 163 센티미터의 작은 키를 가진 평양의 평범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산 자전거를 가진 살림 정도면 동네에서는 대단한 부자 취급을 받던 때였습니다.
신상균은 그 자전거로 장사 밑천을 실어 나르며 평양 시장을 주름잡던 장사꾼이었습니다. 김일성이 해방을 맞아 평양에 입성한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금의 해방산 언덕에 위치한 당 창건기념관이 당시 김일성의 저택이었는데 신상균이 자전거에 닭을 싣고 찾아왔습니다. 김일성에게 음식을 주고 싶어 찾아 왔다고 하자 경호원은 총까지 들이대며 쫒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또 그 다음날에도 신상균은 어김없이 닭을 갖고 찾아와 장군을 만나게 해달라며 떼를 썼습니다.
하루는 김일성이 산책을 하다 경호원과 거의 몸싸움을 하다시피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수장한 자 같다는 경호원의 말에 김일성은 일단 신상균의 자초지종을 다 들어보자며 저택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마침 저녁밥을 먹기 전이어서 신상균은 김일성과 한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신상균으로부터 나라는 해방됐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더 궁핍해진 평양의 상황을 파악하게 됐습니다. 하여 다음번엔 음식만이 아니라 시장가격도 매일 적어달라는 김일성의 부탁을 받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신상균은 김일성 저택으로 매일 신선한 음식 자재들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정숙은 처음엔 그를 의심하여 그가 갖고 오는 모든 음식들의 독약 검사를 위해 반드시 은수저를 사용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상균의 총명함과 성실함에 탄복한 김일성은 그를 누구보다 총애하게 됩니다. 하여 1977년 경 평양 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주석궁이 건립됨과 동시에 김일성·김정일 일가의 생활을 전적으로 담당하던 내각제2재정경리부가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로 확장 개편 되자 그 수장자리에 신상균을 앉히게 됩니다.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는 김일성의 음식을 담당하는 부서로서 해외는 물론, 북한 내 최고의 음식자재들을 수입하거나 독점하고 있는 부서였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손을 거쳐야만 북한 각 지방 특산물들이 수확될 수 있을 만큼 현지 생산까지 일일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김정일은 어려서부터 신상균이 날라준 음식을 먹으며 자란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신상균이 김정일에게 밉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경이었습니다. 김정일은 평양에서 진행되는 전국농업근로자 대표회의 참석자들을 위한 파티 준비를 위해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가 관리하는 목장에서 1등급 돼지고기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간부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신상균 부장이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김일성이 현지지도를 갔던 지역 공장 노동자들에게 이미 의사당 재정경리부 고기를 공급하도록 수령교시가 있은 뒤여서 그 관철이 우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전국농업근로자 대표자들에게 자기가 최고의 좋은 음식들을 선물로 보낸다고 공표한 뒤라며 다시 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역시 빈손으로 돌아왔고 대신 김일성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가 아니라 중앙당재정경리부 목장에서 고기를 갔다 썼으면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듯 김일성의 보호 속에서 신상균은 1994년 까지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 부장으로 지내게 됐습니다. 김정일과 신상균과의 갈등은 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말 김일성의 특별한 신임을 받던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신상균부장이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가 입원치료를 받는 동안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기초 과학 원을 중앙당 재정경리부에 소속시킵니다. 기초과학원은 김일성의 장수연구소로서 막대한 외화사용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에서 가장 핵심기관인 기초 과학원을 중앙당재정경리부로 이관시킴으로서 신상균의 파워를 약화시키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앙당에 기초 과학 원을 빼앗긴 신 부장은 김일성에게 제의하여 금수산의사당 관리부산하에 만청산연구원을 새로 내오게 됩니다. 이어 1988년에 신상균은 오지리, 즉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에서 최첨단 연구 설비들을 대대적으로 구입했고 외국의 초빙교수들까지 초청하여 만청산연구원을 국내 최고의 장수연구소로 성장시키는데 전력하였습니다. 결국 기초 과학원 까지 빼앗았지만 더 크고 더 실력 있는 만청산연구소로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 권위를 강화하게 되자 김정일은 신상균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여 김일성 사망 1년 후 김정일은 신상균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임시켜 버립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에겐 신영민이라는 맏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처럼 큰 사람이 되라며 김일성이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학부로 보내주었고, 졸업 후에는 금수산의사당 재정경리부에서 근무하도록 해주었던 인물입니다. 신영민에 대해서는 만청산 연구원 출신 탈북자도 만청산연구소 당 비서로 근무했다고 증언합니다. 김정일이 신상균과 별 감정이 없이 잘 지낼 때에는 맏아들 신영민의 결혼식에도 직접 참석하고 오메가 금시계를 선물로 채워주기도 했을 만큼 각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상균이 김정일에게 밉보인 이후부터 신영민은 당 조직부의 검열에 시달리던 끝에 아버지의 해임과 함께 만청산 당 비서 자리도 끝내 내놓게 되었습니다. 북한 정권은 인민에 대한 수령의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권력의 내부사정은 이렇듯 완전히 달랐습니다. 김정일은 권력층 간부들에게 수령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을 위한 충성심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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