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네." 이 민요는 북한이 정말 경치도 좋고. 살기도 좋았던 1970년대에 나온 노래입니다. 노래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요즘 북한 TV방송을 보면 이렇게 삶의 즐거움을 흥취 있게 구가하는 새 노래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전부 김정일을 찬양한다거나, 혹은 선군만이 살길이라는 비장한 내용의 노래들입니다. 하긴 1960년대에는 여러분들도 많이 불러 잘 아시겠지만 "천리마 기수의 노래"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지요. "공산주의 언덕이 저기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던 공산주의 언덕이었는데 오늘의 명곡은 어떻습니까? "사회주의 지키세" 이렇게 노래 마저 뒷걸음 친 북한입니다.
오늘 우리 한반도는 국토의 분단만이 아니라 빈부로 갈라진 분단이기도 합니다. 남한은 세계12개 선진국인 반면 북한은 세계 최빈국으로 말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됐을까요? 북한이 정권초기 남한보다 경제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북한에는 금, 석탄, 광물 등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했습니다, 둘째는 8.15 해방 전 식민지 지배와 동북침략을 위해 일제의 산업시설이 대부분 북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냉전시대 덕분이었습니다. 독점적인 미국 달러의 자본시장과 달리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사회주의 동구권은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이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더욱이 중국이나, 구소련과 국경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육지로도 얼마든지 물류 유통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대부분 벌방지대여서 낙후한 농업국이었고, 동, 서, 남해로 둘러싸인 섬나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발전소도 변변한 것이 없어 해방 전에는 북창발전소의 전기를 썼는데 이 마저도 김일성 정권이 평양에 들어서던 1948년에 전력을 차단해버렸습니다. 하여 19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이 고려연방제 전략으로 흡수통일을 꾀할 만큼 남한에 비해 상당히 경제가 앞서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역전 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장기집권으로 민족발전을 주도한 반면 김일성은 자기 개인을 위한 장기독재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북한의 경제가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수령 신격화 때문입니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이윤 추구를 위한 자본 유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소모성 동상이나 혁명 전적지, 사적지들을 만드는데 탕진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국가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령이익을 위해 국가자본이 계속 투자된 것입니다. 비슷한 그 연장선에서 1970년대부터 1호 계획제도가 신설된 것이 국가계획경제 붕괴의 주요 발단이 되었습니다. 1호 계획이란 신격화 차원에서 수령이 임의로 갔다 쓸 수 있는 별도의 경제계획을 뜻합니다. 예컨대 김일성이 농촌현지지도 중 즉흥적으로 자동차 몇 대를 주라고 말하면, 국가 유일 경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던 생산과 공급의 균형에 틈이 생기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매 공장마다 인민경제와 별도로 수령교시 집행을 위한 1호 계획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령 신격화 나라이다 나니 이 1호 계획이 국가계획보다 더 위에 놓이게 됐습니다. 결국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경제, 즉 수령경제와 인민경제가 운영되게 되었고, 그 과정에 사회주의 계획경제 순환구조가 깨지게 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념국가인 북한은 당이 절대 권력이기 때문에 1970년대 말부터 인민경제를 초월한 당 경제가 머리를 쳐들게 됩니다. 인민 경제가 국내 경제라면 당 경제는 대외경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 경제에는 39호실과 38호실이 있는데 39호실은 북한과 외교관계에 있는 나라들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부서이고 38호실은 비외교 국가와의 무역거래를 통해 외화벌이를 하는 부서입니다. 오늘날 남북경협을 당 38호실이 맡고 있는 이유도 남한이 북한과 비 외교관계에 있는 적대국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시장이 활성화 될 때에는 39호실은 김일성 비자금 금고였고, 38호실은 김정일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1호 경제에 이어 당 경제, 그리고 여군수산업인 제2 경제까지 우선되다 나니 자연히 인민을 위한 내각경제는 최하위로 밀리게 됐고, 결국 나라경제가 엉망이 됐던 것입니다.
북한 경제가 붕괴된 또 다른 원인은 경제의 구조문제를 넘어 기본은 김 씨 부자의 무능력과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남한에 뒤지기 시작했던 북한 경제를 그나마 버티게 했던 기본 동력은 물물교환이 가능한 사회주의 시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시장이 붕괴될 무렵인 1989년 북한은 서울의 88올림픽에 도전한다며 평양에서 세계13차 청년학생 축전을 벌이게 됩니다. 88서울올림픽은 돈 버는 잔치였다면 89평양 축전은 빚진 잔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 같은 큰 나라도 기피하는 이 세계축제를 신격화 선전을 위해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서 이미 사회주의 시장을 잃어버린 내각경제의 마지막 원천을 완전히 고갈시키게 됩니다.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킨 요인이 바로 외화 바꾼 돈표였습니다.
김정일은 조선중앙 은행에 평양 89청년학생축전용으로 외화 바꾼 돈표를 발행하도록 지시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적국인 미국의 달러가 사회주의 북한에서 유통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북한 주민들이 축제기간 비싼 외화로 수입한 외국 상품들을 국내 원화로 사지 못하게 하기 위한 화폐 차별화였습니다. 그래서 달러도, 원화도 아닌 중간단계의 화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원화에 외화 바꾼 돈표라는 글자만 추가된 허술한 도안이어서 가짜화폐가 발생하면서 새 화폐를 다시 만들어 발행하는 이중지출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초기에 벌써 많은 외화를 낭비하게 된 그 돈들은 사실 일본 조총련 신용조합에서 만경봉호로 실어 나른 불법외화였습니다. 북한은 일본의 그 6억 달러와 당 자금 4억 달러를 합쳐 10억 달러 규모로 김경희 경공업부장 산하에 통일발전은행을 신설하고 북한 최초로 세계 신용 거래권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평양의 축제는 초라하게 끝났고, 남은 외화 바꾼 돈표마저 김정일의 선물정치로 마구 남발되는 통에 초기 달러와 외화 바꾼 돈표 환율이 1대 1이던 것이 1997년경엔 6,000대 1로 벌어지다 못해 나중엔 휴지조각이 됩니다.
결국 김정일을 믿고 돈을 북한으로 밀 반출시켰던 조총련 신용조합은 일본 경찰의 조사와 함께 재산차압에 들어가게 되고, 동경에 있는 조총련 주요 건물들까지 팔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김정일이 얼마나 무능했으면 바다 건너 일본 교포들의 경제까지도 무너뜨렸겠습니까? 이런 김 씨 일가의 정치지배로 1994년엔 배급제마저 붕괴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북한은 세계 최빈국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제가 남한에 오니 분단을 실감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북한의 어르신들은 "우리는 옛날엔 잘 살았는데."라고 말씀하시던 반면 남한의 어르신들은 "우리는 옛날엔 못 살았는데."이렇게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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