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 김정일 간에 첨예했던 권력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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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탈북자 장진성 씨가 전하는 김 씨 일가의 실체, 노동당 통일 전선부 대남 정책과 연락소 부원이었고 김정일을 두 차례나 접견한 일급작가 이었던 장진성 씨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60년 독재 체제와 현대판 봉건 세습에 대한 진실과 배경을 밝힙니다.

(음악: 사향가)

'사향가' 김일성이 가장 좋아했던 애창곡입니다. 가사가 없어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수가 묻어있는 선율이어서 북한을 떠난 지 몇 년 된 저도 가끔 불러보는 이 노래입니다. 정말 김일성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일성이 하루에 한 번은 꼭 부를 만큼 대단히 좋아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고향인 평양을 수도로까지 만든 김일성이 왜 그토록 애절한 사향가의 정서에 빠져 살았을까요? 과연 어떤 그리움과 한이 남아있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김일성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지난 방송 때 제가 김조실록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 이조실록의 5백년을 본 따 김조실록 편찬을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그때 편찬조의 한 성원으로서 당시 제가 봤던 자료들을 토대로 오늘은 김일성, 김정일 간에 첨예했던 권력 갈등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 씨 왕조국가인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에는 김일성 통일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1994년 7월 7일"이라고 김일성 필체로 새겨져 있는데요. 북한 정권은 그 통일비로 김일성이 죽는 순간까지 통일업무를 보았고, 그래서 조국통일이 유훈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은 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 사망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얼마나 통일 환상에 빠져있었으면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방문 후 답례로 서울에 가서 읽을 연설 원고까지 이미 써놓았겠습니까? "서울 시민여러분! 백두산의 김일성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북조선은 주먹이 강하고 대신 남조선은 잘산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 민족은 무서울 것이 없다. 나진-선봉, 청진 황금의 삼각주를 왜 남들에게 주겠는가? 남한에 개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일성의 그 자필연설 원고는 유품과 함께 고려연방제통일업적 선전용으로 한때 금수 산 기념궁전에 공개 전시되기까지 했었습니다.

또한 4.15 문학 창작 사에서 출간한 김일성의 마지막 7월을 주제로 하는 장편 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그 소설에선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백두산의 호랑이 김일성이 왔다"고 수정하도록 부추기는 묘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정 반대였습니다. 김조실록 편찬 자료들 중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94년 7월초 김정일이 직접 주관한 당중앙비서회의 문서가 있었습니다. 그 문서는 "지금의 정세상황에선 조국통일보다 사회주의 수호를 위한 실천적 발전방안들이 더 모색되어야 할 때"라고 강조하는 내용들입니다. 그 비서회의가 말해주듯 만약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연방제형식의 통일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북한이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왜 김일성은 무리하게 추진했을까요?

그 이유는 김일성에겐 외교 권력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명목으로 그동안 사실상의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한 김정일에 밀려 금수 산 기념궁전에서 여생을 외로이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1980년 10월에 열렸던 6차 당 대회 이후 왜 2009년까지 단 한 번도 당 대회가 열리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김일성이 정치국위원회의에서 김정일의 과도한 권력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당 조직비서에게 여자가 너무 많다고 비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권력불안을 느낀 김정일이 김일성의 당 총비서 권력이었던 정치국회의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그렇게 유명무실해진 당 중앙기능에 의해 당 대회가 이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당 조직비서 유일비준제도 때문에 모든 권력을 상실한 김일성은 당 총비서로서 당회의 소집제안을 할 수 있는 형식적 권력마저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년 중 단 한번 김일성이 공개자리에 나갈 수 있는 신년 연설도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편집 중계를 걸치도록 제한받았습니다. 하여 말년에 김일성은 궁여지책으로 통일외교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 했었던 것입니다. 그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의 평양방문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외교를 내세워 북핵 문제를 완화시키도록 지미 카터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터 대통령과의 사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정상회담을 수락한다는 돌출발언을 하게 됩니다. 김정일은 당황했으나 이미 세상에 알려졌고, 또 북핵 해결 연장선에서 남북화해 카드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정치적 타산으로 처음엔 이를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점점 기정사실로 발전해 가고 있는 남북정상회담과 통일 분위기는 김정일의 권력명분을 위협했으며 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정일은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그 시점에 당 중앙 비서회의를 주관하여 통일보다 사회주의가 더 우선임을 역설하게 됐던 것입니다. 김정일이 묘향산특각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김일성을 방해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김일성의 영생을 기원하는 북한 기록영화에는 사망 당일인 7월 7일 김일성이 직접 내각 상들을 불러 회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엔 철도상이 일어나 발언하고 이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김일성에게 김복신 여 부총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김일성이 철도 상에게 김영삼 대통령이 육로로 오게 하려면 개성부터 평양까지 지금의 단선철도가 아니라 복선철도를 놓아야 하는데 6개월이면 가능하냐고 물어봅니다. 철도상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격노한 김일성이 그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쌀을 주면 가능하다는 철도상의 말에서 배급이 중단된 사실을 처음 안 김일성은 즉시 회의장 밖으로 나갑니다. 북한 강연 자료들에선 김일성이 그날 업무 과 부담으로 유달리 담배를 많이 찾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그 상황이 있은 직후부터였던 것입니다.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온 김일성이 탁자를 치며 몹시 흥분해있자 김복신 부총리가 김일성을 위로하기 위해 4월에 주지 못했던 학생들 교복을 7월이면 공급을 다 끝낼 수 있다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날 오전회의는 끝내 더 하지 못하고 오후 회의를 위해 회의장을 나왔던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첫 심장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내각 상들이 모두 평양으로 호송되고, 회의장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헬기는 도중에 추락되고 두 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땐 이미 김일성의 심장은 멎어 있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핵문제와 남북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급격히 돌아가자 세계 언론은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암살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었습니다,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회고록을 집필했던 작가와 그 측근 들은 충격적인 증언을 했었습니다. 김일성이 김우중 회장과의 단독면담 자리에서 "지금 평양에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있다. 당신이 망명지역을 알아봐 달라"고 조용히 그리고 애절하게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저의 기억 속엔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북한 기록영화를 보면 "태양의 미소" 영정사진을 발기한 김정일이 김일성 사망 후 4일째 되는 날 완성된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만수대 창작 사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김일성의 영정사진을 보며 소리 내어 웃는 김정일의 얼굴이 나오는데요. 아마 그 장면 앞에서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 더욱이 그때로 말하면 웃음, 그 자체가 반역이 되던 무서운 슬픔의 날들이 아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