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어버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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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에는 주민들에게 엄격한 공산주의 미풍양속을 설교하는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일부다처제와 그리고 그 여인들의 불우한 운명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선 김 씨 일가의 실체에 대해 발설하는 것은 물론 아는 것 자체가 정치적 중범죄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격화 김정일과 실제의 김정일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감추면 감출만한 이유 때문에 더 알고 싶은 법입니다. 아무리 엄격하게 통제한다고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은 은밀한 사생활과 신변보호를 위해 엄청난 인력이 김정일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왕궁의 비밀과 함께 그 안에서 평생 갇혀 살지만 일부는 간혹 남들과 다른 특혜 신분으로 외부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왕궁과 현실과의 격차에서 누구보다 먼저 체제모순을 느낍니다, 그래서 김정일의 사생활을 발설하다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북한에 있을 때 김정일이 섹스파티를 자주 즐기던 대동강초대소의 전직 의례 원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비밀의 대가로 출세와 부유한 삶을 약속받은 그가 격양된 어조로 말해주던 김정일은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라 방탕과 타락, 사치로 연명하는 추인이었습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한다면 김정일의 첫째 부인은 김영숙이었습니다. 그 전에 김정일은 이미 남편까지 있던 영화배우 성혜림과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혜림의 남편 리평은 월북 작가 리기영 초대 북한문예총위원장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성혜림의 전 남편은 외국주재 참사로 임명받았는데 사실상 국외로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김일성은 대노하여 둘의 사이를 부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성혜림의 결혼경력도 문제지만 김정일보다 나이가 6살이나 위인 1937년생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수령 집안의 망신이고 수치라고까지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직접 서둘러 물색한 여성이 함북출신의 김영숙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 여자의 출신 신분 자체가 불만이어서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고위간부의 딸도 아닌 너무 평범한 가족의 둘째 딸이었고 시골 여자인데다 아마 김정일이 좋아할 만한 얼굴도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 아들에게 김일성은 '역대왕조를 돌아보면, 권세가의 집 딸을 왕후로 들인 왕들이 나중엔 여자 일가친척의 권력에 밀려났다'며 혼사를 강요했습니다. 김정일은 세습권력을 위해서라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결혼식이 김정일의 평생에 단 한번 뿐인 공개적이면서도 합법적 결혼이었습니다. 또 그 결혼식으로 하여 김정일은 그 이후의 아내들과는 공식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동거형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그마한 인간적 실수도 허용 되선 안 되는 북한 지도자의 신격화 경력에 이혼이란 있을 수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동거에서 1971년 김정남을 낳았고, 계속되는 아버지의 강요로 본처 김영숙과의 사이에서도 1974년 김설송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영숙의 자질과 성격을 문제 삼아 합법적 이혼절차도 없이 주울 초대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보냅니다. 김영숙은 그 초대소에 갇혀 살다 나중엔 자궁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성혜림과의 부부 정이 계속 유지된 것은 아닙니다. 성혜림은 정신질환 치료를 받다가 러시아에서 사망했는데도 김정일이 화환조차 보내주지 않을 만큼 철저히 버려지게 됩니다. 그 비극의 시작은 김정일이 1970년대 중반 문화예술부 지도 과정에 고영희란 여성 에게로 마음이 돌아서면서 부터였습니다.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 속에 당시 나이가 18세에 불과했던 이름 없던 무용수가 일약 북한의 4대 무용 중 하나인 "조국의 진달래"여주인공으로 발탁됩니다. 성혜림은 나이가 김정일 보다 6살이나 위였던 반면 고영희는 14세나 어렸습니다. 김일성은 또다시 대노하여 김정일의 인간성 자체를 공개 비판하기에 이룹니다. 단지 세 번째 여자라는 그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고영희가 다른 출신도 아닌 재일교포 출신이어서 김정일로 하여 수령 일가의 혁명전통 순결성이 오해받는데 대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공개 자리에서 아버지야말로 어머니께 죄를 진 사람이라고 반항했다는데 그 내막은 이러했습니다.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은 산후 과정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죽기 몇 시간 전 면회 온 김일성과 심하게 다투었다고 합니다. 여비서였던 김성애와의 불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한 공개 자료들 중에는 병원에서 나온 김일성이 강서벽돌공장으로 가는 길에서 뜻밖에도 김정숙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개인보다 인민에 대한 사랑 으로 차를 돌리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시 김일성의 그 행동이 더 의심 받아서인지 김정숙의 사망 후 빨치산 권력가들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김정숙은 병사가 아니라 김일성이 바람을 피워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 김정일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고영희와 동거하며 김정철, 김정은, 두 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고영희도 2004년 8월 유방암으로 사망합니다.

김정일의 여자들이 이렇게 모두 산후병으로 단명한 것은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한데 대한 호르몬 순환의 문제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정일은 당조직부 5과가 뽑는 수많은 궁녀들 속에 둘러싸여 산 반면 왕후들은 항상 외로운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불만족했는지 김정일은 1980년부터는 김옥과의 동거를 또 시작합니다. 김옥은 금성고등중학교 졸업생으로서 왕재산경음악단 피아니스트였던 기쁨조 출신입니다. 김정일은 성혜림에게선 모성애 같은 따뜻한 마음, 고영희 에게 선 청순한 미모에 반했다면 김옥 에게 선 당돌 하고 도도한 성격에 끌렸었나 봅니다. 가끔 버릇없이 호통 칠 줄도 아는 그 매력이 독재자 김정일 에겐 역설적으로 마냥 귀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허락들이 어느새 김정일의 여자라는 절대 지위로 인정되어 그의 당당한 존재는 북한 간부들과 문화계에선 이미 은밀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언론들이 김옥에 대해 처음 보도했던 시기는 2007년 7월 23일이었지만, 이미 2년 전 인 신동아 2005년 8월호에서 "김일성 사망 직전 부자암투 120시간"이란 제목의 특별 기고를 통해 최초로 김옥에 대해 상세히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장기집권으로 다 가진 것 같지만 결국은 평생을 처음처럼 같이 할, 단 한 사람의 의 부인도 제대로 갖지 못한 김정일, 지금 노년의 김정일은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