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의 부인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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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본처인 김정숙이 사망하기 전 김성애라는 여인과 인연을 맺습니다. 1949년 김정숙이 사망한 뒤 김성애는 김일성과 결혼하고 북한정치의 막강한 권력자로 올라서게 됩니다. 그렇지만 김성애와 그 주변 인물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계모였던 김성애에 대해 살펴봅니다.

192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김성애는 한국전 당시 김일성의 집무실 비서로 일했습니다. 김일성은 본처 김정숙이 살아 있을 때부터 김성애와 만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김정숙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다큐멘타리 김정일'의 저자 이자 북한 전문 인터넷 뉴스인 데일리 NK의 손광주 국장은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손광주

: 농민의 딸이었는데 6.25 전쟁 시기에 김일성을 도와서 비서 역할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김일성과 동거를 하게 됐다. 원래 김일성은 김정숙이라는 첫 부인이 있었고 그런 가운데 김성애와의 동거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정숙이 사망한 이후 김성애는 사실상 김일성의 아내가 되었고 1954년에는 김정일의 이복동생이 되는 김평일을 낳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김일성과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손광주 국장의 말입니다.

손광주

: 김성애는 김일성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아들 둘을 낳는다. 첫째가 김평일이고 둘째가 김영일 이다. 딸은 김경진이라고 있다. 김성애는 아들 둘을, 김평일은 군의 리더로 김영일은 내각의 주요 인물로 키우려는 욕망이 있었다. 김성애 스스로는 1970년대에 여맹 위원장을 맡았다.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은 김성애는 그 때 부터 북한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북한 대학교수 출신 김현아 씨의 말입니다.

김현아

: 김성애가 정치무대에 안 나서고 있다가 북한에서 당의 역사사상체계를 67년부터 시작된 세우던 사업이 시작되면서...

김성애는 당사업과 행정사업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었으며 중앙당 부장과 책임자들을 호령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고 이들은 김성애의 말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손광주 국장의 말입니다.

손광주

: 한때는 김성애가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의 정치적 역할보다 앞서 나가는 중량감이 나가는 인물로 평가 받은 적도 있다. 그 이유는 김성애가 1970년대 여맹위원장을 맡으면서 김일성이 노동신문에 김성애 여맹위원장의 말은 나의 말과 같은 정치적 비중을 갖는다고 말해 김성애의 정치적 위상이 상당히 올라간 적이 있다.

김성애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지자 북한의 언론들은 김성애의 사진을 김일성과 똑같은 크기로 싣고, '김일성의 교시'와 '김성애 여사의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고 김일성이 한 말과 똑같이 '교시'로 표기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성애는 또 '어머니 교양실' 운동을 통해 자신의 '어록'을 뿌리고 다녔고 '김성애 여사 말씀 연구록'이라는 책까지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을 교육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김성애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70년대 무렵 김일성은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큰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장남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게 됩니다. 당시 김정일은 자신의 친모 김정숙을 격하 하려는 김성애의 노력에 앙심을 품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손광주

: 김성애가 비교적 김정일에게 잘 하려고 했지만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김성애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김정일의 입장에서 김성애는 비록 계모이지만 자신의 어머니이자 김일성의 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김성애에 대한 모함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1973년 중순, 김정일은 김성애를 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됩니다.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이 김일성이 아끼던 인민대학습당 부지에 허락 없이 집을 짓고 살던 것이 김일성에게 들통 나면서 김성애의 신임은 떨어지게 됐고, 김정일은 이 기회를 틈타 김성애의 월권행위와 비리를 아버지에게 일일이 고해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장성택을 통해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들춰내게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성애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김현아 씨의 말입니다.

김현아

: 김성애는 곁가지로 완전 매장됐다. 자기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 까지는 안 보냈지만 거의 사회적으로 고립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정일은 김성애 일가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써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보장받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이번 주 순서를 마칩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