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정일의 곁가지 투쟁

0:00 / 0:00

1974년 2월, 북한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됐습니다. 그렇지만 김정일이 순탄하게 후계자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공식지명되기 전 근 4년 동안 자신의 정적들과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소위 ‘곁가지 투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정일의 곁가지 투쟁을 살펴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신이 인정하는 직계가 아닌 가족을 ‘곁가지’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김정일은 자신의 계모였던 김성애를 비롯해 김성애가 낳은 김평일과 김영일 등 자식들을 모두 곁가지로 분류해 그들을 오늘날 까지 철저히 견제하고 있습니다. 북한 전문뉴스 데일리 NK의 손광주 편집국장의 설명입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 김평일(오른쪽) - PHOTO courtesy of Poland city of Narew (www.narew.gmina.pl)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 김평일 - PHOTO courtesy of Poland city of Narew (www.narew.gmina.pl)

손광주

: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원가지 그리고 곁가지라는 말을 만들었다. 원가지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로 이어지는 장자 개념...

김정일의 곁가지와의 투쟁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김일성이 우러러 보던 중국과 소련이 후계자 문제를 놓고 진통을 겪자 김일성은 살아있는 동안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동생 김영주와 장남 김정일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손광주

: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인 것은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였다. 두 사람의 권력투쟁은 김일성의 신격화에 대한 경쟁이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으로 부터 권력을 받은 측면도 없지 않지만. 스스로 권력투쟁을 벌여서 스스로후계자 자리를 쟁취한 측면이 강하다.

김영주는 자신의 조카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김일성의 의지를 확인하고 1973년 조직비서 자리를 김정일에게 물려주고 정무원 부총리 자리로 내려오게 됩니다. 1974년 2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자 김영주는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합니다. 손광주 국장의 말입니다.

손광주

: 김영주 같은 경우에는 자강도로 가서 연금생활을 오래 했다. 1990년대 쯤 복권이 됐지만 실제로 정치적 활동은 못하고 있다.

김정일은 삼촌과의 후계자 자리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당시 김정일에게는 만만치 않은 정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일성의 둘째 부인 김성애였습니다. 김성애가 1969년 중앙여성동맹위원장에 올라 그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고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후에도 안심을 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김성애는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 김평일과 김영일을 당 지도부의 중요한 위치에 심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김정일은 이들 곁가지를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손광주 국장의 말입니다.

손광주

: 김평일은 군으로, 김영일은 당으로 보낼 계획을...

김성애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격하하려는 노력을 펴자 김정일의 김성애에 대한 미움은 더욱더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부인이자 자신의 계모인 김성애를 함부로 모함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김정일은 자신의 매제인 장성택에게 김성애의 뒷조사를 지시했습니다. 1973년 김정일은 곁가지들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맞습니다.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이 김일성 몰래 인민대학습당 부지에 개인주택을 짓고 산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김정일은 여맹에 대한 내부 검열을 실시하고 이듬해인 1974년 이들에 대한 공개비판 회의를 개최합니다. 이때부터 김성애를 비롯한 이른바 곁가지 세력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 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정된 뒤 김성애를 제거했다. 여맹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견제 했던 김평일은 이 과정에서 혹독한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김정일은 이복동생 김평일이 아버지 몰래 특각에서 술을 마시고 논 사실을 김일성에게 보고했고 김일성은 이후 김평일이 북한 내에서 재개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이후 김정일은 곁가지들과 그들의 측근들을 한직으로 내몰거나 해외로 내쫓아 국내에서 세력을 모으는 것을 철저히 막았습니다.

손광주

: 정치적으로 크지 못하도록 김평일의 경우 외국대사로 내보내 권력의 중심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를 했다.

김평일은 폴란드 대사로 나가 아직도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동생 김영일은 독일주재 북한 대표부 참사로 일하다 99년 병으로 객지에서 사망했습니다. 자신의 정적들이 외국에 쫓겨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안심하지 못했습니다. 김정일은 1988년 곁가지들을 철저히 감시하는 임무를 띈 '10호실' 조직해 오늘날 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이러한 곁가지 투쟁 역사가 또다시 반복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차남 김정은이 지난해 말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김정은은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남과 곁가지 투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손광주 국장은 말합니다.

손광주

: 앞으로 김정은에 대한 권력 이향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은이 김정남을 견제할 것은 틀림없다. 김정은도 김정남의 동향을 계속 보고 받고 김정남이 후계체제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조치할 것으로 예상한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이번 주 순서를 마칩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