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록을 보면 마치 김정일은 태어났을 때부터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됐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정되기 까지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오늘 김 씨 일가의 실체에서 김정일의 불우한 성장기를 살펴봅니다.
1941년 2월 16일 출생한 김정일은 올해 70번째 생일을 맡았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올해 김정일의 69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김일성의 출생년도인 1912년과 끝자리 숫자를 맞추기 위해 북한지도부는 김정일의 생년을 42년으로 바꾼 것입니다. 북한 지도부가 바꾼 것은 김정일의 출생 년도뿐만이 아닙니다. 북한의 모든 전기들은 김정일이 인민학교 시절부터 중, 고등학교 전 과정에서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처럼 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인민학교 시절에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을 읽었고 아버지의 주체사상을 탐독했다는 것은 마치 김일성이 중학교를 다닐 때 마르크스주의를 읽고 초등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쳤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수 십 년간 김 씨 부자를 연구해온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현대 북한의 지도자'라는 책을 통해 이 같은 북한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서 교수는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처음 언급한 것은 1955년 12월 인데, 그 때 겨우 13살이었던 김정일이 주체사상을 탐독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합니다.
<이북에서 주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55년 12월 김일성이 처음 당 간부들에게 주체를 세워야 겠다며 연설을 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거꾸로 올라가 김일성이 태어난 때부터 1920년대 30년대 까지 올라가는데 그것은 훗난 만들어 낸 것이지 주체사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과 달리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대학 교육까지 마쳤다는 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김일성과 크게 다른 점이라고 서 교수는 말합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김정일의 일대기를 보면 김정일의 학창시절은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 제1중학교에 입학했고 1957년 8월 졸업했습니다. 그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56년. 김정일은 북한의 제1차 5개년계획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 교조주의 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했다고 북한 당국은 주장합니다. 또 그가 남산 고급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8년에는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고 이 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했다고 합니다. 남한 정보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은 학창시절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지만 상위권을 유지했고, 학창시절 그의 관심은 음악과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으며, 독서를 즐기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김정일은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아버지 김일성과 김정숙이 활동했던 소련에서 성장했습니다. 광복이후 북한으로 부모와 북한으로 들어간 김정일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김일성과 김정숙은 김정일의 오늘날 유일한 누이동생인 김경희를 낳았습니다. 김정일에게는 남동생이 있었지만 김정일과 분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동생을 잃은 김정일은 머지않아 자신의 어머니마저 저세상으로 보내게 됩니다.
남한의 북한대학원 대학 류길재 교수의 말입니다.
<김정일이 태어나서 7살쯤 어머니 김정숙이 사망을 했다. 그러다 보니 김정일이 김일성과 생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김성애와 결혼하면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부분이 있다. 특히 김일성과 김성애의 자식들이 태어나면서 김정일이 조금씩 김일성으로부터 멀어진 측면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김정일의 청소년기는 어둡고 우울했다고 합니다. 특히 계모 김성애와의 관계,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과 김영일 등과의 경쟁관계는 훗날 그가 권좌에 올라 친모 였던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게 된 동기가 됩니다.
김정일의 유년기는 우울하고 어두웠지만 그가 대학에 진학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성격은 치밀하고 예민해 지기 시작합니다. 류길재 교수의 말입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의 나이가 20대가 될 때부터 김정일이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64년에 졸업한 이후에는 바로 지방당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 같다. 그런 능력이라는 것은 대부분 다 당 간부들의 사생활이나 사업성격과 내용을 정보 보고를 하면서 김일성의 신임을 얻게 됐다. 처음부터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 찍힌 것은 아니지만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전 기간 동안 김정일이 보여준 여러 가지 능력들이 김일성의 마음을 잡은 것 같다...>
결국 김정일은 동생과 어머니의 사망, 그리고 계모와의 갈등 등 우울한 청소년기를 극복하고 김일성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차곡차곡 쌓아가게 됩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이번 주 순서를 마칩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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