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김정일을 만났을 때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신격화 구조와 그 실체가 얼마나 허황한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1999년 5월 22일 노동신문에 소개된 서사시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를 쓴 저자입니다. 그 서사시는 원래 김정일 생일을 겨누어 2월에 만들어진 것인데 보고 날짜가 지연되는 바람에 한국에서의 5.18광주봉기 기념일에 억지로 맞춰 통전부가 5월에 보고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머리시도 5.18에 맞게 재구성하여 재창작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노동신문에 서사시를 전문 싣도록 지시한 다음 통전 부 간부들과 함께 저를 찾았습니다. 아마 그때가 밤 12시가 넘었던 것 같습니다. 101연락소 당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지금 비상소집이다. 빨리 나왓! 1시까지다. 아 참,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왓”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때 당비서의 “비상소집”이란 말에 굉장히 흥분했습니다. 북한에서 “비상소집”이란 보통 전시동원 용어이지만 그럴 경우 사전 예고를 합니다.
중앙당에 근무하는 간부들은 평시의 “비상소집”을 둘 중 하나로 대충 알고 있습니다. 우선 김정일 접견을 위한 보완용어이다. 북한에선 김정일에게 불려갈 때 어느 누구도, 심지어 군 최고수뇌들도 목적과 행선지를 사전에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 당위원회가 호출하고, 거기서 김정일 경호원들에게 인계되어 비밀스럽게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비상소집”은 그 첫 단계 강제성을 위한 명령어인 셈입니다. 이런 무게를 가진 단어여서 가끔 국가보위부가 고위간부들을 숙청할 때도 이용합니다.
“비상소집”이란 당위원회의 전화를 받고 아무 의심 없이 새벽에 혼자 집을 나섰다가 귀신도 몰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직장에 도착해 보니 싯누런 군복에 가죽 벨트를 X자 모양으로 착용하고 양 옆에 권총을 찬 김정일 경호부대 군인 수십 명과 일본 닛산 12인승 소형 버스 3대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소형버스는 3대였지만 가운데 소형버스에 오른 7명만 접견호출을 받은 민간인들이었습니다.
당 대남비서인 김용순, 통전 부 제1부부장 임동옥, 통전부 정책담당 부부장 채창국, 정책과 부과장 박영수, 그 외 조국 평화통일 서기국 참사 2명과 그 중 나이가 제일 어린 저였습니다. 소형버스에 올랐을 때 경호군관의 명령은 매우 무례했습니다.
“이동 중 커튼을 열지 말라, 차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옆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라.” 경호군인들은 이렇게 반말에 가까운 명령조의 큰 목청으로 우리를 제압했습니다. 국가 최고 수뇌 중 한 사람인 김용순 당비서도 경호군인들 앞에서는 순종할 수밖에 없는 평민이었습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옆 창문은 물론 앞의 운전석에도 초콜릿 색깔의 두터운 커튼이 내려져있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지 못하니 차가 흔들릴 때마다 멀미가 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새벽 2시에 출발하여 2시간 정도 달린 끝에 우리가 도착한 것은 어느 역전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본 저는 1호 역전인 용성 역이라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습니다. 평양시 북쪽 방향의 교외에 위치해 있는데 가끔 그 곁을 지나칠 때마다 눈에 익혀왔던 것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용성 역까지 오는데 30분밖에 안 걸립니다.
그러나 경호차량들은 우리의 방향감각에 혼동을 주기 위해 일부러 2시간이나 평양시를 빙빙 돈 것입니다. 기차로 갈아 탈 때에도 우리는 처음처럼 신분증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별열차의 외형은 “북경”이란 한자가 박혀있는 중국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는 온통 일본 “미쯔비시” 로고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좌석은 모두 1인 침대 식으로 돼 있었는데 군인들의 감시가 가능하도록 개방형이었었습니다.
소형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인들은 또 다시 명령조로 이동원칙들을 강조했습니다. “커튼을 열지 말라, 이불은 침대 밑에 있다.
화장실을 갈 때에는 반드시 혼자 움직이지 말고 경호원을 불러 함께 이동한다. 지금부터 열차가 멈출 때까지 잠을 잔다. 이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도중에 하차시킨다.” 7명을 위해 용성 역을 출발한 특별열차는 오전 6시 경에야 멈추었습니다.
그동안 경호군인들의 무례한 몸수색과 매서운 시선에 심적으로 시달렸기 때문인지 기차 문이 열리는 순간 얼굴에 닿는 새벽기운이 한결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역은 강원도 1호역전인 갈마역 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소형버스로 옮겨 탄 우리들은 1시간 정도를 달리고, 거기서 또 어뢰정으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어뢰정은 출발부터 무서운 굉음과 속도로 아주 무책임하게 내달렸는데 난간을 붙들고 있는 제 손을 경호군인이 뒤에서 무쇠 같은 두 손으로 꽉 부여잡았을 때였습니다. 순간 그 결박감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 억센 힘은 마치 김정일 근처로 갈 때에는 사소한 변심도 품어선 안 된다는 노골적 협박 같았습니다. 둘러보니 저 뿐만 아니라 다른 6명 뒤에도 경호군인이 한 명 씩 붙어 안전벨트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저는 혁명영화 속의 김정일처럼 우리를 기다렸다 반겨줄 줄 아는 그런 친애하는 지도자를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섬의 초대 소에서도 4시간이나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접견 실로 보이는 50평 정도의 방에 갇혀 꼼짝없이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오후 12시 30분쯤이었습니다. 갑자기 경호군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흰 장갑을 낀 군인이 들어와 김정일이 앉게 될 의자와 식탁을 스프레이로 뿌려댔습니다. 한편 중장 계급을 단 부 국장이라는 장령이 우리를 한 줄로 세우더니. 먼저 손목시계들을 벗어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김정일 근접
경호원칙은 그 어떤 작은 쇠붙이를 갖고 있는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는 “장군님과 악수를 하기 때문이다.”며 나누어준 작은 봉투 안의 수건으로 손을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산이었는데 뜯으니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르는 작은 목화 솜 수건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어 그 부 국장은 제일 나이 어린 저를 노려보며 심각한 어조로 강조했습니다.
“장군님 앞에 서있을 땐 눈을 마주봐선 안 된다.(자기 목 아래 두 번째 단추를 가리키며)여기를 봐야 한다. 알겠는가?” 그렇듯 시각적 평등도 허용치 않는 김정일이었습니다. 드디어 모두가 차렷 자세로 김정일을 기다리는데 기이하게도 새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밑으로 굴러들어왔습니다.
털이 꼬불꼬불한 말티즈 종자의 흰둥이였습니다. 그 강아지의 뒤를 쫒기라도 하듯 허둥지둥 따라 들어서는 김정일, 우리는 그런 지도자를 향해 목청껏 “만세!”를 불러야 했습니다. 역시 김정일의 개였습니다. 제 듣기에도 우리 7명의 만세 합창은 엄청 요란한데 그 강아지는 그런 환경에 익숙했는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접견 실 안의 사람들을 쭉 들러보던 김정일은 제일 뒤에 서 있는 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지나쳐 더 뒤로 가더니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고 쓴 벽에 걸린 구호 앞에 서서 김용순 당 비서를 불렀습니다.
“야 이리 와봐 이거 손 수예야? 아니면 에나멜이야?”
김용순이 우물쭈물하자 호위국 부 국장이 대신 “손 수예라고 대답했다. “이게 보기 좋은데, 왜 다른데 가보니깐 거긴 에나멜로 썼던데, 이게 훨씬 보기 좋잖아?” 김정일이 이렇게 말하자 김용순은 수예 실은 모두 수입산인데다 워낙 비싸서 에나멜로 쓰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정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 한참 보더니 주저 없이 “전국적으로 이걸로 다 바꿔”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바로 뒤에서 듣고 있던 저는 속으로 계산해보았습니다. 전국의 모든 실내 구호들을 저 수입산 수예 실로 쓰면 그 돈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말입니다.
그날 김정일과 함께 했던 오찬에서 기억나는 몇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음식이 나올 때마다 조명이 바뀌는 것이 저에겐 굉장히 기이했습니다. 야채가 나올 때에는 풀색에서 연보라 빛으로, 육류가 나올 때에는 핑크 빛에서 진한 붉은 빛으로 변했습니다.
생선은 음식보다 접시가 더 인상 깊었습니다. 큰 흑색 그릇 안에 빙 둘러있는 작은 불빛들이 모여 가운데 하얀 생선살을 더 반짝거리게 했습니다.
요리의 절정은 “불붙는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의례 원이 아이스크림이 든 잔을 가져와 그 위에 어떤 액체를 부은 다음 불을 붙였더니 새파란 불이 활 활 일었습니다.
수화상극(水火相剋)을 수화일치(水火一致)로 연출한 그 아이스크림을 저는 한국에 와서도, 그리고 외국관광 나가서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당이 선전하던 김정일이 아니라 현실 속의 김정일을 보았습니다. 먼저 식탁 밑에 있는 김정일의 구두를 보고 속으로 흠칫 했습니다. 아마 안팎으로 12cm 정도는 높인 듯했습니다. 그렇게 항상 신고 다녀야 하는 키 높이 구두의 피로 때문인지 김정일은 대중을 상대하지 않는 편한 자리에서는 습관적으로 벗는 것 같았습니다. 발은 키 높이 구두 위에 올라서 있고, 머리는 파마로 키우고 살았던 김정일, 그러나 그때 제가 본 김정일은 어림잡아 162cm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키였습니다. 저를 또한 당혹하게 했던 것은 김정일이 큰 목청으로 하는 반말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가 저에게 세뇌시켰던 김정일의 어록들은 무조건 명문장이고, 조국의 진로였습니다.
그런데 실제 들어 본 김정일의 음성에서는 주어와 술어마저 마구 엇바뀌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의아하게 했던 점은 여가수가 오찬의 흥취를 돋우기 위해 노래를 부를 때였습니다. 로시아 민요의 전주가 끝나고 1절이 막 울리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김정일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제 옆에 앉은 간부들도 똑같이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들더니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금방까지도 환희로 빛나던 얼굴들이 하나같이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펑 펑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착잡한 그 혼동 끝에 마침내 노래가 끝냈을 땐 실내에 흐느낌 소리가 꽉 차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못지않게 또한 신기했던 것은 조명이 서서히 켜지자 그 빛을 따라 흐느낌 소리도 거짓말처럼 재빨리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겐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충성심을 목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 절대 권력의 지도자인 김정일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하는 의심도 가져보았습니다. 눈물은 참을 줄 아는 자가 흘릴 줄도 아는 법입니다. 왕자로 태어나 평생 권력으로만 살았던 김정일의 삶에는 실망, 희망, 꿈, 절망과 같은 인간의 구체적인 감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공허한 인생이어서 김정일에겐 눈물이란 어쩌면 그림움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노래라도 붙잡고 울고 싶은 인간이 되고 싶은 것,
또 그 눈물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을 거듭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북한 당선전선동부는 김정일의 인간성을 눈물이 많은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김정일의 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싶은 피눈물이라고,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장진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