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여러분, 지난 시간까지 저는 ‘고난의 행군’시기 북한을 휩쓸었던 인민군 보위사령부 검열과 그 배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1999년 양강도에서 강행된 인민군 보위사령부 검열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보위사령부는 1998년 남포시에 대한 검열에 이어 1999년 1월부터 9월까지 양강도에 대한 검열을 끈질기게 어어갔습니다.
사실여부는 좀 더 파악해봐야 하겠지만 애초 인민군 보위사령부는 남포시 검열에 이어 자강도를 검열하려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당시 양강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간부들은 긴장감이 많이 풀려있던 상태였습니다. 보위사령부가 자강도를 검열할 동안에 자신들이 저지른 부정부패의 흔적을 충분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게 당시 지방 간부들의 셈법이었습니다. 그런데 1999년 1월 뜻밖에도 새해를 맞는 양강도에 보위사령부의 선발대가 도착했습니다.
양강도에 대한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당시 신임 도당 책임비서였던 이수길의 요청으로 진행됐습니다. 1998년 7월 양강도당 책임비서였던 이길송이 평안북도당 책임비서로 옮기며 자강도당 조직비서였던 이수길이 양강도당 책임비서로 발령됐습니다. 이수길은 당시 자강도당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의 오른팔로, 연형묵이 직접 김정일에게 소개한 인물이었습니다. 연형묵의 추천으로 양강도당 책임비서 자리에 오른 이수길은 발령된 첫날부터 무역부문과 사법기관을 집요하게 들추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혜산시가 완전히 자본주의화 되었으니 시급한 대책이 절실하다”는 내용의 제의서를 작성해 김정일에게 보고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당 간부들과 사법기관, 무역기관 간부들의 부정부패는 비단 양강도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수길이 조직비서로 있던 자강도만 해도 만포시와 희천시, 증강군을 비롯해 크고 작은 간부들의 부정부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길이 양강도의 문제를 요란하게 떠들게 된 배후에는 상전인 연형묵이 있었습니다.
전임 양강도당 책임비서였던 이길송과 연형묵은 같은 만경대혁명학원 졸업생들이며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공부를 한 유학파 출신들이었습니다. 연형묵은 체코의 프라하 공대를 졸업했지만 이길송은 소련의 레닌그라드 공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만큼 학력적으로나 정치적 출세문제에 있어서 이길송과 연형묵은 치열한 경쟁자였습니다. 이수길이 책임비서로 발령되기 바쁘게 “혜산시의 자본주의화, 양강도의 황색바람”을 떠든 것도 결국은 연형묵의 입김이라는 게 간부계의 추측이었습니다.
이길송의 과거를 파헤쳐 정치적인 경쟁자를 영원히 제거하려는 연형묵의 모략이었다는 것입니다. 양강도에 보위사령부를 끌어들인 신임 책임비서 이수길 역시 자강도에서 저지른 죄행이 드러나 1999년 12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숙청됐습니다. 이수길의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양강도가 없어져도 좋으니 범죄의 뿌리까지 모조리 들추어내라”고 보위사령부에 지시했습니다. 예상치 않던 보위사령부의 검열이 시작되자 양강도는 간부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말 그대로 공포의 도가니였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1999년 1월 9일 30여 명으로 된 선발대의 도착으로 시작됐습니다. 선발대는 현재 김일성, 김정일 동상과 가까운 ‘혜명여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선발대는 주로 인민반과 장마당을 돌며 주민들의 여론을 수집했습니다. 보위사령부의 검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양강도의 간부들은 선발대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괜히 떨었다’는 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도 몰랐습니다.
선발대 30여 명이 주민들의 여론들을 수집하는 동안 보위사령부는 중앙에 보고된 양강도의 각종 문건들을 조용히 검토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를 갖춘 보위사령부는 1999년 3월 8일 단번에 검열성원 6백여 명을 혜산시에 들이 밀었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 7처 부처장 김종은을 총 책임자로 한 검열성원 6백여 명은 모두 소좌(소령)급 이상의 군 간부들이었습니다. 본 검열대가 주로 사복차림에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옷차림이었던 반면 기본 검열대는 모두 군복차림이었습니다.
여느 군 지휘관들과는 달리 번쩍이는 군화부터 군모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차림새는 남달랐습니다. 이들은 혜산시 춘동 지구에 있는 양강도 지구사령부(당시 9군단)에 거처를 정하고 지구사령부 군인들도 대량으로 투입해 검열을 시작하였습니다. 양강도 도소재지인 혜산시를 중심으로 인민반과 각 기관기업소에 파견된 검열성원들은 ‘신고’를 받은 대상들에 한해서만 집중적인 검열을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간부들과 주민들의 공포감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체스추어(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선발대에 의해 이미 검열대상을 확보했고 양강도 보위부가 그동안 조사했던 대상들의 혐의도 모조리 쥐고 있었습니다. 혜산시 혜신동 구강병원 근처와 위연동의 역전여관 근처엔 오래전부터 보위사령부 7처가 운영하던 비밀아지트가 있었습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 7처는 국경과 해안을 전담하는 부서로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경지역이나 바다를 낀 지역들엔 어디라 할 것 없이 비밀아지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지트들은 선발대로 파견된 성원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지트들은 보위사령부의 공식명칭으로 혜산초소, 위연초소였습니다. 외부는 높은 울타리로 둘러 막혔고 안에선 독일산 사냥개를 키우는데 일반 주민들은 물론 간부들도 접근이 허용 안 돼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지트에 들어가면 감방과 고문실, 조사실 외에도 근무인원들의 병실과 사무실, 식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매 아지트들엔 초소장이 있었는데 계급은 상좌 이상이었습니다. 소장 외에도 보위군관 3명과 병사 10명, 식모가 따로 있었습니다.
혜산시 주민들은 이 아지트들을 가리켜 혜산보위소대 또는 철도보위소대라고도 불렀습니다. 현직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는 건물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무엇을 하는 군인들인지 알 수가 없어 주민들이 편하게 부르기 위해 붙여놓은 이름이었습니다. 혜산시에 대한 보위사령부의 검열 당시 이 초소들은 주요 간부들이 수시로 모여 파악된 현안을 토의하는 장소로 이용됐습니다. 정작 3월 초에 파견된 기본 검열대도 장기적인 주둔지를 마련하며 한 달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99년 4월, 보위사령부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실시됐습니다. 검거대상은 당, 국가보위부를 제외한 모든 간부들과 주민들이었습니다. 지방의 중간급 간부들, 그 중에서도 제일 윗선만 검열할 것이라던 주민들의 생각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양강도 혜산시는 북한의 주요 밀수 거점이었고 아편거래의 본산지였습니다. 보위사령부가 간부들만 아닌 일반 주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게 된 배경은 북한에서 혜산시가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보위사령부에의해 맨 처음 공개 처형된 사람들이 아편거래와 아편중독자들이었음도 이러한 반증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입니다. 보위사령부가 공개처형한 사람들 말고도 비공개로 처형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지금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권력에 환장된 김정일이 보위사령부를 내세워 양강도에서 저지른 만행들은 다음 시간에 계속 이야기 드리려합니다. 지금까지 출연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