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사생결단으로 대한민국을 향하게 됩니다. 그들의 목적은 더 나은 교육이나 미래, 또 자신과 가족의 병 치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을 강행한 것 입니다.
대한민국에 와서 병원에 입원하면 의사들은 '북한은 무상치료제여서 병이 나도 돈 한 푼 안들이고 무상으로 치료할 수 있다던데 왜 병을 고치려고 목숨까지 걸고 오느냐', '북한의 무상치료제가 거짓말이 아니냐'고 묻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무상치료제는 김정은과 고위특권층들만 누리는 제도'라고 대답합니다. 이 방송을 청취하고 계실 북한의 형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신이 정말 무상치료제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이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김정은과 고위특권층, 그리고 그 가족들일 것입니다. 한줌도 못되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북한의 모든 인민들은 '호랑이가 껌을 씹던 옛말'이라고 실소를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북한에는 김정은과 고위특권층들을 위하여 2006년 이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벌린 봉화병원과 고위층들을 위해 지은 봉화진료소, 남산진료소, 군 장령(영장급)들만 취급하는 어은진료소, 김만유병원과 같은 의료 시설들이 있습니다.
이 병원들이야 말로 북한에서 '무상치료제'를 시행하고 있는 몇 개 안되는 보건 의료시설들입니다. 물론 여기에 입원하려면 돈과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절대다수의 인민대중은 이런 병원에 발을 들이 밀 꿈도 꾸지 못합니다.
병이 나도 제대로 검진을 받을 수 없고 약 처방이라도 받으면 장마당에서 약장사꾼들을 통해 출처도 불명확한 약들을 사서 먹어야 하는 실정입니다. 각 도, 시, 군에 있는 인민병원도 간부들을 위해 침실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매일 쫓아다니는 고위간부들에겐 주치의사가 한명씩 따라 붙어 있습니다.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에겐 심장혈관내과, 비뇨기내과, 신경외과, 일반 외과, 치과 등 부분별로 해당 주치의가 있어 건강을 특별히 관리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담당했던 주치의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해 드리려는 홍건의 박사였습니다. 홍건의박사는 1926년 12월 2일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의 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머리가 좋았던 홍건의 박사는 어렵게 살면서 치료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고생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의학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꼭 부모님들에게 효성을 다하리라고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홍건의 박사는 1946년 평양에 처음 설립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평양의학대학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속해 있었는데 2년 후인 1948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김일성이 1950년 '6. 25전쟁'을 도발하자 대학 당위원회에서 모든 학생들을 군의로 전쟁에 참가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대학 4학년에서 공부하던 홍건의 박사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군의관으로 전선에 파견됐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많은 부상병들을 치료하면서 대학에서 배운 리론(이론)을 실천 으로 익혔고 1952년 모든 대학생들을 소환하여 학업을 재개할 데 대한 김일성의 명령이 하달되어 전선에서 돌아와 다시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1953년에 대학을 마친 홍건의 박사는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제11호 병원, 일명 11호 병원이라고 불리는 곳의 심장혈관 내과에서 군의로 발령받아 많은 환자들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쌓은 실력이 인정돼 홍건의 박사는 195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 나라들 가운데서도 제일 의료기술이 발전했다고 알려진 독일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심근경색 구급 소생 법이었습니다.
심근경색은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혈관, 다른 말로 관상동맥이라고 하는 핏줄이 혈전이라는 핏덩어리에 막히거나 핏줄이 줄어들어 혈액공급이 중단되었을 경우 심장근육이 손상되는 치명적인 질환을 가리키는 의학용어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중대 방송에서 김일성의 사망원인을 심근경색이라고 보도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비대에 걸리면 피 속에 있던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로 핏줄이 굳어지고 혈소판이 활성화되어 피가 응고하게 됩니다.
그렇게 응고된 핏덩이가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막아버리면 영양물질과 산소를 보장받지 못한 심장근육은 곧 손상돼 사망을 초래합니다. 심근경색을 촉진하는 질병은 당뇨, 고혈압, 흡연인데 김일성은 이런 요인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심장순환기내과의 여러 가지 실습을 진행하며 경험도 쌓고 실기가 높아진 홍건의 박사는 1961년까지 조선인민군 제11호 종합병원 순환기내과 의사로 근무 하면서 인민군 의학대학인 김형직군의대학 순환기내과 강좌교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김일성은 50살이 되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비만과 동맥경화증이 심해 졌고 부정맥까지 겹쳐 조기노화가 촉진되었습니다. 부정맥과 심근경색은 조금만 방치하면 강한 통증으로 쇼크가 오고 심장이 멎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의사들을 데려다가 진료를 받고 가족들과 고위간부들은 외국으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건의 박사는 북한에서는 가장 뛰어난 순환기내과 의사로 1962년부터 조선적십자종합 병원 기술부원장을 겸하면서 김일성의 주치의사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김일성의 주치의사로 심혈관질환을 치료하는데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김정일은 홍건의 박사를 봉화진료소의 순환기내과 과장 겸 기술부원장으로 승격시키고 김일성의 80돌 생일을 맞은 1992년에는 김일성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치료경험과 지식을 담은 의학·과학도서들을 많이 저작하였는데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로인의 건강과 장수', '허혈성심장병'이 있습니다. 홍건의 박사는 김일성의 주치의사로서 김정일의 신임과 배려를 가장 많이 받았지만 1993년에 뇌혈전으로 풍을 만나 김일성의 주치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홍건의 박사가 풍을 만나 공로보장을 받으면서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은 심해진 심근경색이 발작하여 묘향산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봉화진료소의 리락빈 소장은 "홍건의 박사만 있었더라면 수령님(김일성)의 생명을 구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홍건의박사는 뇌혈전으로 치료받던 중에 병이 재발되면서 1997년 4월 27일 72살의 나이에 안타깝게도 사망했습니다. 김정일도 여러 차례의 경증 뇌혈전으로 앓기를 거듭하다가 결국 김일성처럼 급성심근경색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심혈관계 질병이 가족 내력인 김정은은 30대 초반인데도 불어난 몸집을 가늠 못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신들만의 무상치료제를 만들어 놓고 온갖 혜택을 다 누리며 치료를 하고 있지만 가족의 병 내력을 물려받은 이상 장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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