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김일성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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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가오는 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일 105돌이 되는 날입니다. 김일성은 23년 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생일은 손자인 김정은에 의해 북한에서 '태양절'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북한의 많은 간부들도 김정은이 김정일의 첩에 불과했던 재일교포출신 무용수 고용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김정은과 그의 모친 고용희는 김일성의 눈을 피해 원산초대소에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생전에 자신에게 김정은이라는 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런 관계로 하여 김정은은 지금껏 할아버지 김일성과 사진 한 장도 남길 수 없었습니다. 김정은이 떠드는 '백두혈통'도 온갖 거짓으로 일관된 모략이었습니다. 김일성이 '백두혈통'이라는 근거는 과거사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일성 일가를 '백두혈통'으로 만들어준 세 가지 거짓말, 즉 김일성 일가의 고향 바꾸기와 이름 바꾸기, 과거사 바꾸기의 그 실체를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김일성부터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생전에 김일성이 자기 고향집이라던 만경대를 과연 몇 번이나 찾아보았는지 대답해 주실 분이 혹시 계시는지요? 북한의 학생이라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혁명 활동' 교과서를 보면 김일성은 해방 전인 1912년 4월 15일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에서 김성주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고 서술돼 있습니다. 지금의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이 그곳이었습니다.

해방 후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만경대에 들린 것은 할아버지 김보현과 할머니 이보익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할아버지 김보현과 할머니 이보익이 살던 집이 오늘날 북한이 김일성이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는 만경대 고향집입니다. 하지만 당시까지 김보현과 이보익이 살던 만경대에서 김일성이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할 그 어떤 자료도 없습니다. 해방 후 김일성의 어린 시절 친구나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해 줄 사람들이 없었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북한은 어린 시절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태어났고 동네대장으로 '군함바위'에서 일제와 싸우는 놀이를 좋아했다고 선전합니다. 그렇다면 해방 후 김일성과 함께 놀고 소꿉시절을 보냈다는 친구들 몇 명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김일성의 출생과 관련한 내용을 증명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은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요? 한국에서 여러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해방 전 김일성의 가족들은 기독교 교파인 안식교의 성실한 신자들이었습니다.

김일성 일가는 당시 고평면 남리에 있던 안식교 교회에 다녔는데 훗날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공부했던 평양숭실학교도 기독교 분파인 안식교가 운영했습니다. 가난 탓인지 모르겠지만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18살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칠골 안식교 장로 강돈욱의 딸로 김형직과 결혼한 강반석은 당시 스무 살이었습니다. 김형직은 결혼 초기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본가보다 교회 장로로 가정에 여유가 좀 있었던 처가인 강돈욱의 집에서 머물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김일성의 고향집은 만경대에 있던 묘지기 김보현의 가정이 아닌 기독교 장로 강돈욱의 집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면 김일성은 왜 속 시원히 고향을 만경대 주변 칠골이라고 밝히지 못했는가 입니다. 평양의 고위급 간부들은 다 아시겠지만 김일성이 태어난 강돈욱의 집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막히고 한눈으로 봐도 별채까지 달린 부잣집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선전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강돈욱이 기독교계의 장로였고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종교를 미신이라고 선전하던 김일성의 처지에선 자신이 태어난 환경과 고향을 솔직히 밝힌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두려웠으리라는 분석입니다. 이런 원인들로 하여 해방 후 김일성은 할아버지 김보현이 살던 만경대를 자신이 태어난 고향집으로 거짓 선전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철저히 숨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역시 자신이 거짓으로 꾸며낸 고향집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사람은 가장 어려울 때에 고향부터 찾는다고 했는데 김일성은 해방 후 할아버지를 찾아 만경대에 들렸을 뿐 이후 만경대에 들른 기록은 없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례배당(교회)'에 가지 말자고 동네 아이들을 끌고 다녔다는 김일성, 그렇게 끌고 다녔다는 동네 어린이들은 해방을 맞은 고향땅에서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고향만 왜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아버지인 김형직 사망 후 김일성은 화성의숙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때가 15살부터 17살까지 사이였습니다. 화성의숙은 민족주의 조직인 정의부가 세운 독립군 간부양성소였습니다. 북한은 예술영화 '조선의 별'에서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하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김일성이 나이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민족주의 학교인 화성의숙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는 첫 공산주의 단체를 만들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김일성은 화성의숙을 다니던 도중 아버지인 김형직의 사망소식을 듣고 중국 안도현 소사하 마을에 있던 집을 찾아왔습니다. 북한은 그때 아버지 김형직이 남긴 두 자루의 권총을 가지고 김일성이 처음으로 무장투쟁에 나섰다고 선전을 합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김형직이 사망하자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중국의 큰 도시에 있던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길림에는 중국 만주족들과 조선족들로 이루어진 큰 깡패조직이 있었는데 조선족 깡패조직의 두목이 차광수였습니다.

김일성은 차광수의 부하였는데 훗날 북한의 역사에는 차광수가 오히려 김일성의 부하로 등장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차광수를 비롯한 청년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김성주라는 본명에서 '한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또 북한은 김일성이 1930년 6월 30일 중국 만주성 장춘현의 카륜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를 조직했는데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의 한결같은 염원에 의해 한별이라는 별명에서 김일성이라는 별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옛 일제의 문건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922년 경부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평면 칠골에서 태어난 김성주가 10살이 되던 때에 이미 만주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이 일제와 싸웠다는 얘기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수산기념궁전에 누워있는 북한의 옛 독재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도용한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칠골 출신 김성주라는 사실입니다. 태어난 고향도, 이름도 바꾸다나니 지나간 역사도 무두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에 환장이 돼 북한을 세습봉건 국가로 만들어 놓은 김일성, 이제 우리가 인민이 주인된 세상,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를 다시 만들려면 그동안 기만해온 김일성의 역사, 김일성 일가의 역사부터 낱낱이 밝혀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