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책임서기 전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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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김정일의 후계세습 과정에 김일성의 책임서기였던 전하철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은 북한의 최고위층 간부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전하철이라는 이름조차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북한의 새 세대 간부들도 2002년 노동당 선전선동비서였던 ‘정하철’과 김일성의 책임서기였던 ‘전하철’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노동당 선전선동비서였던 정하철은 2004년 조직지도부에 의해 숙청된 인물입니다.

지난 2010년 6월 7일 평양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3차회의에서 내각부총리로 선임된 전하철.
지난 2010년 6월 7일 평양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3차회의에서 내각부총리로 선임된 전하철. (사진-연합뉴스 제공)

하지만 전하철은 김일성 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북한의 몇몇 안 되는 간부들 중에 한 명입니다. 저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김일성의 책임서기였던 전하철의 이름을 귀 아플 정도로 들어왔습니다. 북한의 다른 기관이나 공장기업소들과 마찬가지로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 만청산연구원도 직원들이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30분 동안 조회시간을 가집니다. 조회시간엔 주로 김정일이 전하철 책임서기에게 한 말씀을 전달 받곤 했습니다.

김정일이 전하철 책임서기에게 한 지시가운데서 김일성의 건강장수와 관련된 내용들이 기본적으로 만청산연구원에 전달되었습니다. 김정일이 전하철 책임서기에게 지시한 내용을 전달받으며 저희들은 전하철이 김정일의 책임서기인 줄 알았습니다. 전하철이 김정일이 아닌 김일성의 책임서기였다는 사실을 저는 대한민국에 입국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청산연구원 원장은 금수산의사당경리부장 신상균이었고 부원장 및 초급당비서는 신상균의 둘째 아들 신영민이 겸임했습니다. 신영민 초급당비서는 아침조회 시간에 '말씀전달'을 하면서 늘 "김정일 동지께서 전하철 책임서기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만청산연구원의 종업원들은 누구나 전하철을 김정일의 책임서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책임서기인 전하철을 자기 부하처럼 마구 부려먹고 있다는 현실을 저희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전하철은 1928년 4월 22일에 양강도 후창군에서 태어나 1962년에 내각 사무국 부국장으로 발령받았던 인물입니다. 1965년에는 내각 사무국 제1사무장을 거쳐 1970년 11월에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1987년 10월에는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1990년 6월부터 김일성의 책임서기로 고속승진을 거듭했습니다.

1980년 10월에 진행된 6차당대회는 전하철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임을 살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1970년대 '백두의 혁명정신'이라는 구호를 내놓고 혁명전적지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탕진했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재편하면서 "양강도는 혁명전통의 대노천박물관이며 혜산시는 혁명전적지 관문도시"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양강도의 주요 혁명전적지나 사적지들에 가면 어디서나 이 구호를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극하기 위해 노동당 선전선동부를 장악하고 자신을 대변할 이론을 찾아 헤맬 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혁명전통'이라는 구호를 내놓은 자가 전하철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위해 두 가지를 조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당시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내놓은 '인민철학'을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위장해 김일성이 창시한 사상으로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결국 '주체사상'으로 하여 김일성은 하루아침에 위대한 사상이론가로 변신했습니다. 다음은 전하철이 내놓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혁명전통 이론을 자신의 사상으로 내세워 김일성으로부터 큰 믿음을 산 것이었습니다. '백두의 혁명전통'은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으로 떠받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연고가 있어 김정일은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등극한 후인 1983년 6월에 전하철을 양강도 행정경제지도위원회 위원장으로 파견했습니다. 양강도 일대 혁명전적지 건설을 책임지도록 선심을 베풀었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에서 싸운 김일성을 백두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열혈 혁명가로 둔갑시키는 작업에서 전하철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고민거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김정일을 백두산과 연결시키는 문제였습니다. 이때 전하철은 백두산일대에 백두밀영고향집을 만들고 김일성이 태어난 만경대고향집처럼 혁명전적지 답사일정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김정일에게 있어서 이런 제안은 정말 눈물이 날만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전하철을 앞세워 1980년대 초부터 백두산 주변에 가짜 고향집을 만들고 양강도의 여러 곳에 구호나무들을 미리 조작해 놓았습니다.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에게 김정일의 고향이 러시아라는 것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전하철의 수완에 탄복한 김정일은 그를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김정일의 고향이 러시아라는 비밀을 발설한 일부 빨치산 출신들은 정치적으로 매장되거나 온 가족이 통째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을 백두산이 낳은 아들이라고 조작한 공로로 전하철은 1985년 4월에 이어 1992년 4월에 연이어 김일성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공동통치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에서 전하철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1980년대까지 김일성의 책임서기는 훗날 내각 총리를 지낸 최영림이었습니다. 김일성을 등에 업은 최영림은 김정일에게 만만치 않은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비밀문건들을 김정일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이 내놓은 '속도전'의 영향으로 북한의 경제가 심각하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일에겐 이런 실태가 김일성에게 보고되는 것이 제일 두려웠습니다. 김정일은 국가보위부를 시켜 최영림을 그림자처럼 미행했습니다. 그러던 찰나인 1990년 5월 김정일은 최영림의 자식들이 노동당 간부사업에 간섭하고 있다는 보고를 국가보위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정일은 이 사건을 크게 부각시켜 최영림을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자리로 쫓아냈습니다.

대신 자기 심복인 전하철을 김일성의 책임서기로 올려 세우는데 성공했습니다. 1990년 6월부터 전하철을 통해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보고자료 일체를 김정일은 사전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들은 빼버리도록 했습니다. 지어 김일성에게 김정일의 결함을 보고한 간부들은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북한 농업담당비서 서관희가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정치적인 권한을 모두 잃은 식물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북한에 몰아친 '심화조' 사건은 평소 김정일의 잘못된 행동들을 김일성에게 보고한 고위급 간부들에 대한 숙청사건이었습니다. 전하철이 김정일의 끄나풀로 그 단서를 제공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김일성의 사망이 석연치 않은 점도 그 배후에 김정일의 심복 전하철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에서 김정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수많은 고위급 간부들이 숙청되고 처형됐지만 오늘까지 전하철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비결은 천성적으로 몸에 배인 조작과 배신의 너절함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