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한 비행장에서 김정일의 맏아들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들로부터 테러를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모부인 장성택 처형에 이어 친 혈육인 김정남을 테러한 김정은의 살인 만행은 국제사회의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특히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독극물이 국제적으로 생산과 보유가 철저히 금지된 VX라는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이어서 논란은 더 커가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김정은의 다음 암살대상을 현재 핀란드 대사인 이복삼촌 김평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 지도자와 지도자가 직접 추천한 후계자 외에 대안세력이 없어야 한다는 북한의 봉건세습관리 정책때문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1954년 8월 10일생인 김평일은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아들로 한때 후계자 문제를 놓고 김정일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렸습니다.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12살이나 어린데 17살이 되던 1971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김일성의 외모나 성격을 쏙 빼어 닮은 김평일을 북한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 김정일과는 달리 김평일은 김일성과 같은 풍채와 외모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여기다 김평일은 체육이면 체육, 예술이면 예술, 어느 면에서나 김정일과 비교할 정도가 안 되는 우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훗날 알려졌지만 이런 김평일을 몰아내고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김정일의 모략은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김정일이 후계자 문제를 놓고 김평일을 감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일성의 후처였던 김성애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으로서 당시 북한주민들 속에서 '조선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김일성의 외국방문에도 부인으로 반드시 동참할만큼 대외적으로 상당한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김성애의 동생인 김성갑도 평양시당 조직비서의 직책을 거머쥐고 평양시의 번화가인 중구역 중성동에 따로 저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시절 교수들을 존중하지 않고 교내에서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술을 마시고 대낮에 소련제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질주를 하다가 교통안전대(경찰)에 단속되는 등 말썽거리가 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북한의 권력계에 동창생들을 단 한명도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후안무치한 깡패로 인정돼 대학생활을 할 때 가까운 친구도 없던 외톨이었다고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직원들과 선배들은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김정일의 행동이 어처구니없게도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하던 빨치산 출신들의 동정심으로 번졌습니다. 북한의 권력을 틀어쥔 빨치산 출신들은 옛 전우였던 김정숙을 추억하며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 일가를 질타했습니다. 김정일이 타고난 성격이 온순했는데 의붓어머니인 김성애가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심성이 꼬였다는 것이 그때 빨치산 출신들의 변명이었습니다. 제멋대로 길들여진 김정일에게 빨치산 출신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은 도약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생활할 때 김정일의 후계과정을 잘 알고 있는 북한의 전직 간부들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일성이 애초 김정일을 노동당 중앙위에 끌어들일 엄두도 못 냈다며 그만큼 북한에서 김정일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빨치산 출신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김일성은 마지못해 허락하는 모양새로 김정일을 노동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1964년입니다. 김정일은 자신의 믿음직한 후원자들인 빨치산 출신들을 잘 챙겼다고 합니다. 빨치산 출신들의 생일이 되면 외국산 술과 담배를 비롯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선물지함을 잊지 않고 전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공을 들여온 결과 김정일은 빨치산 출신들의 신임을 얻어 초고속 승진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노동당 핵심 부서였던 조직지도부나 간부들을 뿌리치고 선전선동부에 발을 들이민 이유는 여성들과의 복잡한 관계에서 비롯됐습니다. 선전선동부에 자리 잡으면 미모의 여가수나 여배우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선전선동부를 택한 배경이 김일성의 믿음을 사는데 크게 작용했습니다. 김정일은 빨치산 시절 김일성이 창작했다는 '4대가극', '4대연극'을 재구성해 빨치산 투쟁을 교묘하게 왜곡해 선전하는데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은 아직 노동당 내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김성애 일가를 제압하면서 김평일이 후계자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물리력을 행사했습니다. 도발은 1968년 노동당 선전선동 부부장을 할 때 김정일이 먼저 걸었습니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는 당시 북한에서 무력을 총괄하던 민족보위상 김창봉의 든든한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은 김창봉을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고 언제든 제거하려고 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이 김창봉을 제거하려 든 데는 빨치산 계열의 복잡한 패권싸움이 근원이었습니다.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지휘아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돼 싸우던 조선인들은 김일성 외에도 최용건, 안길 계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민족보위상이던 김창봉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5사를 지휘하던 안길의 계열이 었습니다. 북한에서 일찍이 사망한 김책과 숙청된 박성철은 동북항일연군 제7군 제2로군 참모장이었던 최용건의 계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1941년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연해주로 도피했고 소련군 88혼성여단에서 모두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용건은 88여단의 정치위원으로 김일성보다 직급이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갈래가 복잡하다나니 빨치산 내부에서 패권싸움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한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몰아 숙청했습니다. 1956년 8월에는 종파라는 누명을 씌워 김두봉을 중심으로 한 연안파와 허가이가 주축이 된 소련파 세력을 일망타진했습니다. 1967년 3월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소속돼 있던 갑산파 출신 박금철, 이효순을 숙청해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 출신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속에서 유독 숙청되지 않은 김창봉은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 출신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청봉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의 속내를 깨닫고 이들을 부추겼습니다. 1969년 1월에 열린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창봉은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 출신들에 의해 제거됐습니다. 김창봉의 제거는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손발을 얽어 맨 것이고 김평일을 견제하기 위한 김정일의 첫 포문이었습니다. 같은 해 여름부터 김성애는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아들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혼신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권력계를 장악한 김정일과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에 의해 김성애의 시대는 1974년 여름에 막을 내렸고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넘보던 김평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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