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경락 연구자의 종말

경락 마사지를 하는 모습.
경락 마사지를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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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북한에서는 지난 기간 수많은 인재들이 정치권력의 먹잇감으로 숙청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중에서 1960년대에 '봉한 학설'을 내놓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갑산파 숙청사건으로 사라져버린 동의학자(한의학자) 김봉한 박사와 경락연구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주요 신문사인 중앙일보 사에서 발행한 「북한 인명사전」을 보면 김봉한 박사의 약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졸업,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북, 1953년 1월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부교수, 1961년 8월 논문 「경락 실태와 그 관계」발표, 1962년 1월 학위·학직 수여위원회 제4차 상무위원회에서 의학박사 학위 수여,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강좌 장으로 승진, 1963년 11월 경락 연구의 새 성과에 대한 학술 논문 발표, 1964년 3월 내각 직속 「경락연구원」원장, 1964년 4월 생명 유기체의 자기 갱신에 관한 신학설인 '봉한 학설' 제창.

김봉한 박사는 동의학의 과학화 연구에 착수한 지 5년 만인 1961년 8월 「경락의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첫 논문을 내놓습니다. 2년 후인 1963년 11월에 두 번째 논문인 「경락계통에 대하여」가 발표 되었고 김일성의 생일 53돌이 되는 날인 1965년 4월 15일에 개최된 「조선경락학회 제1회 학술 보고회」에서 세 번째 논문인 「경락학설」과 네 번째 논문인 「산알학설」이 발표됐습니다. 그리고 1965년 10월에 다섯 번째 논문이 마지막 논문이 됐습니다.

1956년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11년 동안 연구되었던 '봉한 학설'은 1967년 김봉한이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박금철과 함께 숙청당해 사라지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또 김 박사의 숙청과 함께 북한의 모든 공식 문건이나 서적에서 김봉한과 '봉한 학설'을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 최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서울대 융합기술원 수석연구원인 소광섭 박사에 의하여 '봉한 학설'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한 번 봉한 학설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잡지 '과학동아'는 2003년 11월호에 '물리학이 경락의 실체를 밝힌다.'는 제목으로 서울 대학교 물리학부 소광섭 교수의 글을 게재하였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손가락이나 발가락에 침을 놓는 건 우리 몸이 경혈과 경락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의학계의 주장입니다. 경락은 한의학 용어로 침혈 자리인 경혈(經穴)을 연결하는 우리 몸 속 지도이며 동의학에서는 경혈과 경락을 통해 우리 몸의 기(氣)가 흐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의학계에선 동물 유기체의 순환계로 혈관과 림프관 두 가지만 인정해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2008년 소광섭 박사는 경혈, 경락에 해당되는 새로운 순환계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잡지에는 이 과정이 소상히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 박사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북한의 생물학자인 김봉한 박사의 주장과 일치한다면서 김봉한 박사의 논문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최근 소광섭 교수는 국제학회에서 봉한학설의 경락계통이 암의 중요한 전이 경로라는 사실을 발표 하면서 세계 의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암의 전이 경로가 혈관과 림프관으로만 설명됐는데 1960년대 북한에서 연구된 봉한학설의 경락도 주요 전이 경로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동의학에서 주장하는 경락의 실체를 규명하고 우리 몸에는 혈액순환계와 림프계에 이어 제3의 순환계가 있다는 김봉한 박사의 주장은 1962년 프랑스의 AFP 통신에도 보도되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AFP통신은 김봉한 박사의 연구가 17세기 인체의 혈액 순환을 처음 발견한 윌리엄 하비의 연구에 견줄만한 매우 중요한 연구라고 평가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김 박사를 초청했고 북한 정권도 김봉한 박사의 연구 성과를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룬 업적"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1964년 판 '조선중앙연감'에 그의 사진을 크게 실었고 그의 연구 성과를 주체과학발전에 힘써온 김일성의 현명한 영도 때문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김봉한 박사의 경락연구는 당시 부수상이었던 박금철이 적극적인 후원을 했습니다. 박 부수상은 평양의학대학 교수였던 김봉한 박사의 연구를 위해 경락연구원을 새로 내오도록 하였고 연구원 부지도 잡아주고 큰 건물을 지어주었습니다. 지금도 평양 시 대성구역엔 삼흥역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옛 경락 연구원입니다.

5층짜리의 이 건물은 현재 '조국사' 청사입니다. '조국사'는 일본에 사는 조총련 자녀들이 다니는 조선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를 만드는 기관입니다. 1967년에 박금철 부수상과 함께 김봉한이 종파로 숙청되면서 경락연구원이 해산되었고 이 건물의 주인도 바뀌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만청산연구원에도 당시 경락 연구원에서 연구사로 있었던 연구원이 있었는데 그를 통해 경락연구원의 일을 어느 정도 알게 됐습니다. 경락연구원에서는 연구내용이 일체 비밀에 붙여졌고 연구부서 간에도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통제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층별로 연구실들이 배정되어 있어 복도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식사도 실마다 따로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평양시내의 병원 산부인과에서 해부실험을 위한 사체들이 공급됐고 출처를 알지 못할 성인 사체들도 연구에 이용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김봉한 박사의 연구업적이 폐기되고 경락연구원이 해산된 이유가 빅금철이 숙청된 갑산파 사건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김봉한 박사가 숙청된 이유가 갑산파 사건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정보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처음 듣는 새로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박금철의 딸이 김봉한과 함께 경락연구를 하였고 그의 연구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자 후원자를 자처한 박금철이 구테타로 김일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면 김봉한을 보건 상으로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 탄로 나 숙청됐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과연 그러면 박금철 부수상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왜 김일성은 박금철의 숙청으로 경락연구원을 해산했고 김봉한을 처형했을까요? 우선 박금철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양강도 갑산출신인 박금철은 일제강점기에 박달과 함께 이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선도하였습니다.

1932년 갑산군 운흥 면에서 야학을 운영하면서 1935년 3월에 반일공산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였고 1936년에는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고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을 대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것이 일제에 의해 탄로되어 당시 조국광복회 조직원 7백여 명이 검거된 '혜산사건' 때에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조국이 광복되면서 출옥한 후 1948년에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이 당에서 축출된 1953년 8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57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1961년 9월에 열린 4차당대회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각부수상 자리에 올랐습니다.

1967년 3월 숙청될 당시 북한 정권은 박금철의 숙청이유를 "당 정책과 혁명 전통교양 대신 부르주아사상과 봉건유교사상, 종파주의, 지방주의, 가족주의와 같은 온갖 반혁명적 사상을 퍼뜨려 당과 인민을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책동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과학연구를 통해 눈부신 성과를 이룬 과학자를 정치적인 권력싸움의 희생물로 삼은 것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물론 김정은까지 이어온 김 씨 일가의 잔인한 권력욕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지금도 김정은이 과학중시를 강조하며 미래과학자거리를 건설하고 여명거리도 신축, 조성한다고 요란을 떨지만 이것은 진정 과학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영도체제구축과 우상화를 위한 선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