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산나물을 키우는 특수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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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오늘은 김씨 일가의 먹을 거리와 생활필수품을 보장하기 위해 여기저기 숱하게 건설한 비밀시설들 중의 하나인 금수산연구소에 대해 이야기해드리고자 합니다.

평양 도심에서 북쪽에 위치한 련못 동을 거쳐 룡성 구역의 룡성 역을 지나 100m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련못동 무궤도버스정류장에 도달합니다. 이 정류소에서 평성방향과 북쪽 순천방향으로 국도가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합장 강을 따라 평성방향으로 북동쪽으로 약1km 되는 곳 도로의 오른쪽에 룡성특수 식료공장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고 반대로 왼쪽은 금수산연구소로 들어가는 도로가 보입니다.

룡성 특수식료공장이 평양시민들은 물론 일부 지방주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데 비해 금수산연구소는 고위간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는 김씨 일가가 소비하는 야채와 산나물, 버섯 등 갖가지 식물성 식자 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기철조망이 설치된 2m 높이의 높은 담장으로 둘러 막혀 있고 24시간 무장인원이 보초를 서는 금수산 연구소 정문을 지나면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동쪽방향으로 모여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연구소 당위원회와 행정사무실 본 청사, 보위대청사, 연구실 동, 자재과사무실, 창고 등으로 청색과 녹색의 뼁끼칠을(페인트) 한 철판지붕이 덮혀져 있습니다. 총 부지 면적은 온실과 노천시험 포전까지 80만여 평방미터에 달합니다.

그중 2만5천여 평의 유리온실은 길이는 80미터와 120미터로 70여 동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10만여 평의 야외시험 포전이 있는데 야외시험 포전은 10여 동의 비닐온실 포전과 노천시험 포전들로 규모 있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금수산연구소의 남쪽 담장 밖으로는 합장 강이 흐르고 주변에 호위사령부의 산하부대들이 위치 하여 있어 접근이 어려우며 무장경비인원의 철저한 봉쇄로 연구소 인원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금수산 연구소가 이런 어마어마한 경계를 유지하고 외부인원의 접근을 봉쇄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갑나이에 이른 김일성의 건강상태는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함량이 증가하면서 순환기 질병들이 나타났고 목뒤에는 커다란 혹 덩어리 종양이 독을 쓰며 왕성히 자랐습니다.

원인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비롯한 동물성 식품의 과잉섭취로 판단되었고 김일성이 좋아하는 채소들을 특별히 재배해 동맥경화증을 예방할 데 대한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채소들을 많이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까지 권력의 기반이 튼튼치 못했던 김정일은 어떻게 하나 김일성의 눈에 돋보이기 위해 백두산 주변 고산지대에 따로 별장을 마련하고 해마다 삼복더위 철이면 이곳에서 김일성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추운지역인 양강도에는 삼지연초대소와 함께 혜산시 강구초대소가 있었습니다. 강구초대소는 북-중 국경까지 거리가 2km도 안되어 1980년대 김정일의 지시로 폐쇄되었는데 이후 양강도 작가동맹위원회에 이관됐습니다.

한번은 혜산시 강구초대소에 피서휴가를 즐기던 김일성이 갑자기 참 취나물을 먹고 싶다고 하여 백두산일대에 사람들을 파견해 일부러 채취해 오도록 했습니다. 허나 이미 철이 지난 참 취나물은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아 비상이 걸렸습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정일은 즉시 온실을 지어 1년 365일 김일성이 좋아하는 참취와 곰취, 드룹을 비롯한 산나물들을 항시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했고 그 결과 지금의 금수산연구소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금수산연구소 설립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건설자들도 성분과 토대가 좋은 대상자들을 특별히 선발했습니다. 평양시 농촌경영위원회 산하 룡성온실 종합농장을 모방하여 온실은 모두 유리로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건설된 금수산연구소는 신상균부장이 직접 관리하는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직속 기관으로 소속됐습니다. 초기 신설됐을 때만 하여도 금수산연구소에는 김일성종합 대학 생물학부를 졸업한 연구사 20여명이 고작이었습니다.

연구과제는 참취나물과 같이 김일성이 즐겨먹는 산나물들을 사계절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참취나물은 북한에서 김일성이 빨치산투쟁을 하던 시절 많이 먹었다고 늘 자랑하면서 아주 유명해진 산나물입니다.

예로부터 참취나물은 맛과 향이 독특하여 우리인민들이 식 재료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참취를 비롯해 산에서 저절로 자라는 산나물들은 채취하는 시기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 그 시기만 놓치면 신선한 맛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산나물들을 온실에서 재배하면 1년 열두 달 어느 때라 없이 항상 신선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매 산나물의 특성에 맞게 온실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온실에서도 자연에서 자란 것과 꼭 같은 맛과 향을 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았습니다.

조건은 어려웠으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위해 금수산연구소 연구원들은 산나물의 온실재배를 무조건 성공시켜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재배하는 남새(채소)류들도 이들에겐 중요한 연구과제였습니다.

김일성은 시금치를 남달리 좋아했는데 하도 시금치를 많이 먹다나니 신석 증에 걸려 수술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시금치에는 싱아산 나트리움염이라는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데 이는 신석 증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밝혀졌습니다.

김씨 일가의 건강을 위해 금수산연구소는 시금치와 같은 남새 류에서 인체에 해로운 성분들을 모두 제거하는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했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서 재배되는 채소들도 재배해 김씨 일가에 정상 공급하기 위한 연구도 본격화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들여온 방울양배추와 중근동이 원산지인 단홍당무 등 10여종의 외국 채소들이 금수산연구소에서 연구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과제가 쌓여가면서 금수산연구소의 연구인원도 해마다 늘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와 평양농업대학, 사리원농업대학을 졸업한 식물육종학, 식물재배학, 농업생물학 전문가 80여 명과 연구조수 30여명, 온실관리원들까지 인원이 250여명으로 확충됐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금수산연구소 연구사들을 해외에 파견해 선진화 된 재배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더 많은 신품종개발을 위해 연구사들이 직접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기하도록 조치도 취했습니다.

연구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금수산연구소에서는 화려한 모양의 꽃버섯다발이 재배돼 김일성, 김정일의 연회석상에 올랐습니다. 외부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봉쇄한 금수산연구소, 이곳에서 연구 끝에 개발한 꽃버섯다발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