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김일성 일가와 특권고위층 간부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평양시 대성구역에 위치하고 있던 아미산총국이 존폐의 위기를 극복하고 호위사령부 제2총국에서 부활하던 과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아미산총국이 북한 전역으로 확장되던 과정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 아미산 일대는 김정은의 신변을 보위하는 호위사령부와 인민군보위부, 국가보위성과 인민보안성이 들어앉은 곳입니다.
평양시민들도 발을 들이밀지 못할 만큼 살벌한 곳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살고 있는 특권층들은 북한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호위사령부 간부들과 중앙당 정치국 위원들을 위한 아미산농장이 있습니다.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의 가정들엔 매일 아미산총국의 냉동차들이 돌면서 싱싱한 남새와 육류, 살아있는 해산물을 공급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시대부터 간부들을 직급에 따라 8호 공급대상, 4호 공급대상, 65호 공급대상으로 분류했습니다.
8호 공급대상은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위원의 가족들로 이들에겐 남새와 과일, 육류가 매일 정상적으로 공급됐습니다. 이들보다 급이 낮은 노동당 과장들, 도당 부장들과 시, 군당 비서들은 주에 한 번씩 공급을 받는 4호 공급대상이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시절 저도 4호 공급대상이었는데 같은 4호 공급대상자라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직접 연구하던 저희들에겐 일반 4호 공급대상자들보다 훨씬 질이 좋은 맥주와 당과류, 육류와 식자재 등의 소비품들이 공급되었습니다.
이보다 낮은 시, 군당 부장급,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급 간부들에 해당되는 65호 공급체계가 있었는데 이들에겐 보름에 한 번씩 담배 한 보루(10곽)와 술 두병, 육류와 식용유를 공급했을 뿐 남새와 해산물과 같은 식자재는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호위사령부 제2국 산하 아미산총국에 소속된 아미산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와 가구공장들은 8호 공급대상자들을 위한 먹을거리와 소비품들을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공급대상자가 많다보니 만수무강연구소 산하 농장과 목장들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아미산농장들에서 생산된 남새는 김일성이 금수산의사당에서 크게 차린 연회석상에도 공급되었습니다. 더욱이 아미산총국 산하 약초농장에서 재배되는 장뇌삼은 대형 목재화분에 담겨 주요 명절이 되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바쳐졌습니다. 북한은 1970년대 미국을 고립시키고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이룬다는 야망아래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몰두하였습니다. 1970년 5차당대회와 1980년 6차당대회까지 10년 사이 북한은 66개 나라들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업적 만들기에 급급했던 김정일은 아프리카 나라들과 발전도상에 있는 신생독립국가 대통령들과 정부대표단을 자주 초청했습니다. 아프리카와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대표단들의 북한방문은 주로 구걸행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제공할 고급 식재료 생산을 늘리기 위해 결국 아미산총국 산하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를 지방까지 확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의 곳곳에 김일성을 위한 별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던 시기였습니다.
별장들은 많이 지어 놓았지만 새로 설립된 만수무강연구소가 8호 농장들을 거느리고 김일성이 가는 곳마다 현지에서 먹을거리들을 충분히 보장할 만큼 몸집을 키우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아미산총국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김일성의 별장들엔 호위사령부가 붙여놓은 대호가 있었는데 현지주민들과 간부들은 대호를 알 수 없다나니 해당지역의 이름에 초대소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평양의 22호 특각을 강동초대소라고 부르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평양의 대동강초대소, 평안남도 자모산초대소, 양강도의 삼지연군 포태리에 있는 삼지연초대소와 못가초대소도 다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됐습니다. 나중엔 김정일 전용의 초대소들까지 북한의 곳곳에 들어서며 호위사령부가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특각을 관리하는 인원과 현지 경비를 책임진 지휘관들의 가족들에겐 김일성이 현지에 머물 때 먹을 수 있는 남새나 육류를 생산하게 했는데 이렇게 지방마다 새로 조직된 남새농장이나 목장을 호위사령부 2국 산하 아미산총국이 관리했습니다.
아미산총국 산하라는 의미로 해당지역의 이름에 아미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졌습니다. 양강도 삼지연군 중흥분장에 있는 록수리 사슴목장을 록수리 아미산목장, 보천군 내곡리 온수평의 남새농장을 온수아미산농장이라고 부르는 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주민들이 아미산이라고 하면 김정은이나 고위층 간부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농장부터 떠올리는 이유가 평양시 대성구역 아미산 주변에 위치한 호위사령부 제2국 산하 아미산총국과 각 지방들로 확대된 아미산농장들 때문입니다.
북한의 지방들에 산재해 있는 아미산 남새농장이나 약초농장, 목장과 수산사업소가 모두 몇 개에 이르는지 구분이 안 되는 원인도 일반 주민들은 물론 지방의 간부들도 출입이 통제되는 아미산 농장들이 너무도 많이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아미산총국 산하 지방의 아미산 농장과 목장들에서 무엇을 키우는지는 김일성의 생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미산농장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 일부 폐기된 특각들을 관리하던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생전에 김일성은 양강도 강구특각과 소백산특각, 남포시 와우도특각을 비롯해 중국과 가깝거나 주민지구와 가깝다는 구실로 일부 특각들을 해체하도록 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용하던 특각들을 모조리 허물어버렸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김일성의 특각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속속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그동안 아미산농장과 목장이라고 부르던 곳들이 무슨 목적으로 조직됐고 그 속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도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덮친 '고난의 행군'으로 굶주린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아미산 농장과 목장들을 습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되었고 그 후과로 일부 관리와 경비가 어려웠던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김일성이 평소 개고기를 즐겨 먹었고 김일성을 위해 전문적으로 개만 키우던 아미산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고난의 행군'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규모가 크지 않고 특정된 몇 가지 채소만 전문적으로 키웠습니다.
특히 아미산 농장들은 해당 지역의 최저 해발고에 위치해 있는 지방의 기상수문관리소들로부터 3백~4백미터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내용들도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김일성의 특각들이 모조리 해체된 후에 외부세계에 알려진 사실들입니다. 만수무강연구소와 산하 수많은 목장과 농장들에 더해 북한의 특권고위층들을 위해 평양과 지방에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일떠섰던 아미산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와 가구공장들, 비록 규모는 줄었으나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수시로 해외에서 사들이는 고급 사치품들도 아미산총국을 거쳐 고위간부들에게 선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아미산농장들에서 생산된 고급 식자재들을 매일 공급받으며 살쪄 온 북한의 고위간부들이 과연 그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김정은을 등질 수 있겠는지 저는 지금도 여전히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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