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판 정경유착,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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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최근에 김정은의 공포정치와 경제난, 핵 참화에 대한 불안 등 어수선한 북한의 현실을 직시하고 망명하는 외교관들이 많아지면서 북한판 정경유착이라는 의미에 대해 국제사회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경유착은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금전적으로 서로 얽히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북한에서는 당이나 정권기관 간부들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행정기관 간부들이나 외교관들과 개인적인 연계를 유지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경유착의 사례를 들자면 일일이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인데 가장 일반적이고 공개적인 방법은 노동당이나 최고인민회의와 같은 정권기관 간부들이 해외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들인 행정기관 간부들의 자식들과 자신의 자식들을 혼인으로 맺어 주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체제가 인민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간부 들 속에서 정경유착은 하나의 생존수단으로 변질됐습니다. 북한에서 정경유착의 근원지는 김정일의 비밀자금을 다루던 중앙당 39호실에서 시작됐습니다.

김정일의 해외 비밀자금을 관리하던 중앙당 39호실은 1980년대 더 많은 달러를 긁어모으기 위해 북한의 각 도소재지들과 도시들에 외화상점을 내오고 당시까지 일반 간부들조차 구경 못했던 외국산 고가의 가구들과 승용차까지 들여다 팔았습니다.

지금은 북한에서 '째끼'라고 하면 별로 관심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명 '째끼'라고 불리던 조총련 산하 북송 재일동포들은 일본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외화상점에 전시된 외국산 호화제품을 사는 계층은 대부분 이런 '째끼'들이었는데 북한 당국은 총련(조총련)에 의해 북한으로 송환된 재일동포의 자녀들과 남노당계 출신의 자녀들을 절대로 간부로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간부들 중에서 외화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육해운성이나 해외에 파견되었던 몇 명 안 되는 외교일꾼들이었습니다. 육해운성은 외형상 내각 소속이지만 실제론 노동당 39실이 별도로 관리하는 무역기관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가 시작되면서 사회주의 경제연합인 '와르샤와(바르샤바) 조약기구'도 붕괴되었습니다. '와르샤와 조약기구'의 붕괴로 경제지원이 끊기면서 북한 당국도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일성과 김정일은 국내에 수많은 무역회사들을 내오고 '충성의 당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데 광분했습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도 1만 달러만 바치면 평양시에 거주권을 줄 정도였습니다.

'황금만능' 사회로 변한 북한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간부들도 금이나 달러를 몰래 보관하기에 바빴습니다. 달러를 편지봉투에 넣거나 담배처럼 돌돌 말아 담배곽에 넣어 건네는 뇌물 상납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부사업을 맡은 당과 정권기관, 권력의 안보를 지키는 보위부나 사법기관 간부들은 자신의 하수인들을 외화벌이 기관이나 무역계통에 임명해 놓고 뒤를 돌보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상적으로 외화를 갈취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북한판 정경유착입니다. 정경유착은 '백두의 혈통'을 자랑하는 항일 빨치산 출신 가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80년대 중반 북한은 '당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에 주재한 대사관들에 무역참사제도를 신설했습니다.

외국에 파견된 무역참사들 중에서 1990년대 사회주의가 완전히 붕괴되는 속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싱가포르 주재 김룡문 무역참사, 중국주재 리성대 무역참사, 나미비아 주재 김문성 무역참사가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 못지않게 실적이 높았던 일꾼은 쿠웨이트 주재 무역참사였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당시 오씨 성을 가진 쿠웨이트 무역참사는 북한판 정경유착의 본보기가 되어 당, 정권기관 간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쿠웨이트 주재 무역참사의 아들은 오봉철이었습니다. 오봉철의 아버지인 쿠웨이트 무역참사는 실적을 인정받아 북한 무역성 부상으로까지 승급을 했습니다. 같은 시기 인민보안상이던 항일 빨치산 출신 백학림에겐 시집갈 나이의 딸이 있었습니다.

1985년부터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부장 직을 맡았던 백학림의 딸은 후처 에게서 낳은 늦둥이로 이름은 백선희였습니다. 백학림은 사회안전부장이라는 직함과 노동당 정치국 위원이라는 명의로 북한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 간부였습니다.

온갖 뇌물을 다 챙기는 백학림의 가족들에게도 고민이 있었는데 외화상점에 마음 대로 드나들며 달러를 펑펑 쓰는 계층엔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해결책으로 백학림의 가족들은 막내딸 백선희의 결혼대상자를 돈 많은 가정에서 찾았습니다.

쿠웨이트 무역참사인 아버지를 둔 오봉철이 그 적임자로 선택됐는데 빨치산 출신 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보통 빨치산 출신 자녀들은 같은 빨치산 출신 자녀들끼리 혼인을 했는데 백학림의 가족이 기존의 틀을 깨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봉철의 가문은 북한에서 '백두산 줄기'로 불리는 빨치산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전까지 오봉철의 가문은 개성에서 유명한 장사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봉철 역시 행정 간부로는 등용될 수 있어도 당 간부로는 발전이 어려웠습니다.

백학림의 막내딸 백선희는 독일에 유학하면서 음악을 전공했기에 외국의 문물에 밝았고 달러에 대한 집착도 컸습니다. 반면 오봉철은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 지리학부를 졸업했지만 아버지의 후광으로 무역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오봉철은 북한의 원유수입과 싱가포르를 통한 '되거리 무역(중개무역)'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돈도 많이 벌어들인 아버지의 슬하에서 편안하게 대학생활을 하였고 달러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오봉철의 가문에도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달러 창고로 불리지만 행정 간부여서 어느 때든 정치 간부들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오백룡 가문과 같은 '백두산 줄기'의 힘이 필수였습니다.

이렇게 찰떡처럼 맺어진 궁합이 부를 거머쥔 해외관련 행정 간부들과 북한 내부 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치 간부들 간의 정경유착입니다. 오봉철과 백선희의 결혼은 김일성도 찬성하는 응답이 없어 주변 간부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치러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 출신 백학림이 과감하게 추진한 딸의 결혼은 북한의 다른 빨치산 출신 간부들 속에서도 현실적 감각이 있는 행동, 미래에 대한 투자 라는 평가를 받으며 김일성도 우려할 만큼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백학림으로부터 시작된 결혼이라는 북한판 정경유착을 지켜보며 김일성은 "이러다 백두혈통의 씨가 마르겠다"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백학림이 개척한 길을 따라 북한에서 '백두혈통'은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김정일 사망 후 일본 출신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은이 감히 '백두혈통'이라는 감투를 쓰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김일성 가문도 백두혈통의 씨가 완전히 말라버렸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현실을 외면한 김일성의 사고방식이 결국 북한을 인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고 정경유착을 통해 또 다른 특권층을 양산해낸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새겨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