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 유년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면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식을 올리고 자녀를 낳아 키우며 나이가 들고 평범한 인생의 추억을 쌓아갑니다.
북한에서는 신분과 계층에 따라 삶의 수준에 극심한 차이가 있습니다. 더욱이 관혼상제를 보면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되고 있는 평양시 경흥관에 대해 이야기 해 드리려 합니다.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위치한 경흥관은 금수산의사당경리부에서 운영하는 결혼식당입니다. 경흥관은 평양 지하철역인 황금벌역에서 경흥거리를 따라 락원다리까지 북쪽으로 약 1km까지 이어지는 종합상업 망입니다.
총 부지면적은 약 5.5정보에 달하며 연 건축면적만 해도 7,200여 평방미터에 이릅니다. 경흥관은 1986년에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신상균부장이 김정일에게 제의하여 건설이 시작 된 지 13개월만인 1987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1988년 2월에 개업식을 시작한 경흥관 내부에는 결혼식당과 불고기 집, 맥주 집, 에스키모점, 외화상점, 농산물 매대, 야시장, 꽃방 등 다양한 봉사시설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데 기본은 결혼식당입니다.
경흥관 결혼식당이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임을 아는 사람은 평양시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평양에서도 소위 '힘 있는 집' 자식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이용하기에 일반시민들은 이런 결혼식당을 꿈도 꿀 수 없습니다.
1987년 9월 7일 완공된 경흥관을 돌아본 김정일이 동행한 일꾼들에게 '인민들이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전문식당을 내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금수산의사당경리부는 방침관철이라는 명분으로 경흥관을 결혼식당으로 꾸렸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일반인들은 물론 간부들도 결혼식은 집에서만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항시적으로 보았던 김정일은 다른 나라들에 결혼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웨딩 홀이라고 가는 곳마다 결혼식당이 있지만 당시까지 북한에서 경흥관은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식당이었습니다. 경흥관에서는 동시에 4쌍이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1호식당, 2호식당 등 4개의 결혼 장이 있습니다.
참석자들은 신랑•신부 측에서 결혼식 전에 보내준 초대장을 가지고 입장을 하게 됩니다. 결혼식당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입장하는 손님들의 초대장을 검사하는 남성직원들이 항시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결혼식장은 40명에서 최대 100여 명에 이르는 손님들을 봉사할 수 있는 방들이 준비돼 있으며 신랑, 신부가 옷을 갈아입고 머리단장과 화장을 할 수 있는 방도 따로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시간은 2시간으로 고정돼 있습니다.
낮 12시부터 결혼식이 허용되는데 하루에 보통 3~5쌍씩 결혼식을 올리며 한해 약 천여 쌍의 신랑신부가 이곳에서 인생의 새 출발을 합니다.
인구 300만여 명에 이르는 평양시의 일반시민들은 이 결혼식장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이 '인민들이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전문식당을 내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아마도 김정일이 말한 인민은 힘 있는 간부들인 것 같습니다. 인민타령을 늘여놓으며 김정은이 짓는 문화시설들도 모두 간부와 돈 많은 부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김일성 일가에게 있어서 인민은 제 주변에 있는 간부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이런 시설들과 함께 경흥관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경흥관에서 결혼식을 치르려면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 예약은 권력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와 같이 '힘 있는 기관'의 간부 자식들이 이 결혼식당의 기본 예약손님입니다. 북한에서 미신행위가 성행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부터 '손 없는 날'이면 볼만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누가 더 힘 있는 간부인가에 따라 이미 체결된 결혼식 예약도 변경되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경흥관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면서 1989년 대동강구역 청류동에 '문수결혼식당'이 개업을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문수결혼식당 역시 힘에서 밀리는 간부들과 총련(조총련)간부 자녀들이 몰리며 힘없는 주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고려호텔과 양각도호텔을 비롯해 외국인봉사기관들도 돈벌이를 위해 결혼식 주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흥관 결혼식당은 북한 내화를 국정가격으로 받는데다가 9호물자를 쓰는 금수산의사당경리부가 운영하다보니 여전히 북한 최고의 특권층 자녀들만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장소로 가장 높은 인기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경흥관 결혼식당은 저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국토환경성 부상을 하고 있는 김경준이 저와 같은 학부, 같은 학과의 동기생인데 그가 경흥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도 그의 결혼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항일 빨치산 시기에 아동단사업을 맡았던 김진이었고 아버지는 중앙당 행정간부 부 부장을 하던 김시학이었습니다. 김경준의 신부 감은 같은 학부 동기인 남산진료소 기술부원장의 딸 최란이었습니다.
봉화진료소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그리고 중앙당 비서나 정치국 상임위원을 위한 특수병원인데 중앙당 과장급 이상과 정치, 사법, 군부에서 김정일의 신임을 받는 간부들은 남산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1989년 11월 어느 날 김정일은 자정이 가까운 저녁에 행정부장 김시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버지가 없던 탓에 김경준이가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이 김경준에게 '대학을 졸업했으니 장가를 가야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정은의 말이라면 곧 법이었던 북한에서 김경준은 당장 다음 달인 12월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습니다. 신랑신부는 가시부모(장인장모)에게 인사를 한 후 만수대예술극장과 주체사상탑, 대성산열사릉에서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결혼식을 시작했습니다.
경흥관에서 있은 이날 결혼식은 김정일이 직접 보낸 선물들로 치러졌습니다. 열대과일들과 고급양주들, 룡성특수식료공장의 고급당과류들과 음식들은 어림짐작해도 북한의 한 가족이 몇 년은 생계를 이어갈 돈이 들어가고도 남았음이 짐작됐습니다.
신랑신부가 같은 학부 동기여서 80여 명의 하객들 중에 알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주례 대신 김정일에 대한 충성의 결의로 된 축사가 있었고 이어 축배 잔들이 오갔습니다. 취기에 들뜬 손님들이 노래와 춤으로 뒤엉켜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한 사람은 일본산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결혼식 장면들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1980년대 중반에 중앙당 부장급 이상 고위간부들에게 일본산 고급비디오카메라를 선물로 주었는데 경준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 카메라의 붕어눈알처럼 튀어나온 렌즈가 독특하였습니다.
결혼식장 양쪽으로 길게 손님들이 앉을 수 있게 놓여 있는 식탁의 가운데 공간은 무도회장처럼 넓어 춤을 추기에 좋았습니다. 경쾌한 무도곡도 끝없이 흘러나왔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자연재해로 농업생산에 큰 피해를 입자 관혼상제를 간소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인민들은 전기도 안 오는 캄캄한 방안에서 조그마한 밥상에 떡 한 그릇, 돼지고기 한 접시와 농택이라고 불리는 술로 대충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인민들에겐 그렇게 요구하면서도 고위상층부의 자식들을 위해서 김정일의 열대과일과 9호제품으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결혼을 차려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시골에서 계시는 부모님들이 생각났고 모순으로 가득 찬 북한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봉건적 독재가 세습되는 북한에서 허세와 과시욕에 들뜬 김정은이 수입 병을 없애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의 아내 리설주가 든 사치품들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그런 사치품들을 위해 노예처럼 외화벌이에 시달려야 할 북한 인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듭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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