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동포 여러분, 청취자 여러분들은 북한에서 일류대학으로 손꼽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에 대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1980년대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총장이었던 박영철이 철직 되었던 사실에 대하여서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책공업종합대학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다음으로 규모가 큰데 제조업관련 기술인재 양성의 원종장입니다.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에 위치한 김책공업종합대학은 1948년 9월 27일 김일성종합대학 공학부를 모체로 발족되었습니다.
초기 평양공업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1951년 1월 김일성의 전우였고 전선사령관이었던 김책이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따 김책공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또 1988년에는 김책공업대학을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창립초기엔 광산지질학부, 금속공학부, 기계공학부, 전기공학부를 비롯해 7개의 학부가 전부였지만 현재는 전자공학부, 자동화공학부, 전자계산기학부 등 18개 학부, 81개 학과에 학생 수만 1만5천여명, 교직원들은 6천5백여명에 이릅니다.
이렇듯 김책공업종합대학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 다음으로 북한에서 단 세 개뿐인 종합대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만큼 김책공업종합대학 총장이라는 지위는 북한에서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담처럼 1980년대에 '강계공산대학' 교원이었던 박영철이 이 대학의 총장으로 발령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김정일은 "숨은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노동당 비서국 결정으로 발기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식물학자 백설희와 농업기술자 김상련, 금속공학자 박영철에게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하였습니다. 이들의 소행을 본받도록 전군중적인 노력혁신 경쟁을 촉발한 것이 "숨은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1980년 1월에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노동당 산하 조직들의 지도력 강화를 목적으로 "숨은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더욱 심화 발전시킬 데 대하여"라는 노동당 중앙위 비서국 결정이 연이어 하달되었습니다.
당시 강좌장에 불과했던 박영철은 하루아침에 김일성의 접견을 받고 '숨은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인생의 역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박영철은 금속공업에서 새로운 주물공법을 내놓아 '숨은 영웅' 칭호에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박영철과 함께 '숨은 영웅' 칭호를 받은 백설희는 14년 동안 연구 끝에 기름골이라는 식용유 작물을 개조해 박사학위와 '숨은 영웅' 칭호를 받았고 김상련 박사는 새로운 벼 종자를 육종하여 박사학위와 함께 '숨은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습니다.
박영철은 박사학위와 '숨은 영웅', '노력영웅'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단번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영광은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총장으로 승진된 것이었습니다.
박영철은 총장으로 부임된 후 배가 든든해야 학업에 열중할 수 있다며 대학생들의 식생활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총장으로 부임된 후 첫 목표가 대학생들에게 매일 우유를 정상적으로 공급하는 후방사업이었습니다.
대학생들과 교직원들의 후방사업을 위하여 김책공업대학의 후방관리 부서들에 독립채산제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독단으로 추진했습니다. 김책공업종합대학도 김일성종합대학처럼 학생들의 식생활 수준을 높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자체의 힘으로 대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대학농장과 목장, 식료공장을 확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토의도 없이 독단으로 처리해 대학 당위원회와 마찰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대학 당위원회는 박영철의 높은 실력과 뚝심 있는 사업처리 방식이 대학생들과 교직원로부터 높게 평가되고 자신들의 위상이 하락하는 데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위원회의 반발은 대학 총장인 박영철과 당 비서의 암투로 번졌습니다.
박영철은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사사건건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당 비서를 밀어내려 시도했고 당 비서 역시 노동당 중앙위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선을 통해 박영철을 반당행위자로 몰아 붙였습니다.
당의 방침과 어긋나게 비생산단위에서의 독립채산제를 강행하려 한다는 게 구실이었습니다. 백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 사람도 아닌 대학 당위원회를 동원한 당 비서의 고발싸움을 박영철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 당 비서와 당위원회의 끈질긴 고발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김책공업종합대학에 노동당 검열위위윈회를 직접 파견해 내부 사업을 요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간이 없다고 박영철을 직접 조준한 검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박영철은 대학의 재산으로 개인의 이익이나 향수를 누리려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지식하고 배짱 있는 교육자여서 그런지 누구보다 청렴 결백했습니다. 하지만 당위원회의 집단지도라는 체제에 위반되는 독단적 행위가 여러 건 제기됐습니다.
검열위원회의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모든 근로자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숨은 영웅이 배은망덕한 짓을 했다"며 박영철의 해임을 지시했습니다. 다행이 금속관련 계통의 권위가 인정돼 평성과학원 금속재료 연구소장으로 초라하게 쫓겨났습니다.
사실 박영철 총장은 대학 당 비서와 맞서는 순간부터 패자로 결정됐습니다. 노동당 중앙위 과장직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당 사업에 관여해 온 당 비서와 학술에만 몸을 담가왔던 박영철은 애초부터 상대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박영철의 딸인 박향순은 김일성종합대학 시절 저와 한 학급 동창이었습니다. 총장으로 부임된 초기 박영철은 김책공업종합대학 구내 저택에서 살았는데 얼마 후 평양역 근처의 노동당 중앙위 위원들이 사는 고급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노동당 중앙위 위원들이 사는 집은 정말 황홀하였습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 막힌 22층짜리 아파트였는데 무장한 보안원(경찰)들이 24시간 경비를 서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는데 그때 벌써 집집마다 냉온풍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984년 4월 15일에 기숙사생활을 하던 우리는 박향순의 초청으로 집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응접실에서 우리를 맞은 박영철 총장은 기숙사 생활이 어렵지 않냐고 물으며 대학을 다닌 보람이 있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위로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김책공업종합대학 식당에서 우유를 공급하는데 식당근무를 나온 학생들이 우유를 빼돌렸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빼돌린 우유만큼 물을 섞어 기숙사생들이 집단설사를 하였다고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자책했습니다.
1990년 평성에 출장 갔다가 대학 동창인 박향순을 만나기 위해 박영철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금속과학연구소 소장이라는 지위는 유지했지만 허접한 옷차림에 공허한 웃음을 짓던 박영철의 초라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고위간부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김정은의 하수인으로 꼬리를 치며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는 암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꼴에 몸을 담그지 않기 위해 북한을 망명해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간부들의 행렬도 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노예국가인 북한에서 내로라 하던 장성택이나 현영철은 뼈도 못 추렸습니다.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김정은의 몸부림도 고위 간부계의 연속적인 이탈로 끝장을 볼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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