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핵연구소 전철영 박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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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것처럼 북한군당국은 2006년 1차 핵실험에 이어 2009년과 2013년 2차, 3차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1월과 9월 한 해 동안에 무려 2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였습니다.

지난 9월 9일에 단행된 5차 핵실험에 대해 북한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핵폭발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여 천만군민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고 김정은의 업적을 과시하는 선전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북한의 각 지방에서도 '핵폭발실험 성공을 경축하는 군민연환대회'를 연이어 조직하고 핵무기 연구에 관련된 과학자, 기술자들을 띄워주기에 한껏 열을 올렸습니다. 북한이 이렇게 무모한 핵실험을 강행할 때마다 저는 전철영 박사를 떠올립니다.

제가 만수무강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지났던 1991년 우리 만청산연구원에 머리가 백발이 된 한 연구사가 새로 배치되어 왔습니다. 이름은 전철영이었는데 내가 알고 있던 북한의 과학계에서는 전혀 낯선 인물이었습니다.

나이는 50대 초반인데 70대를 넘긴 환자처럼 얼굴색이 좋지 않았고 주름살도 깊었습니다. 그는 우리 연구원의 제1실인 검정분석실에 배치되었는데 식재료에 첨가된 방사성동위원소가 인체에 흡수되는 과정을 연구과제로 부여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방사선이라고 하면 다 해로운 것처럼 생각되지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식품연구에서 신진대사 과정을 연구할 때 쓰이는 방사성동위원소가 바로 그렇습니다. 때문에 건강식품 연구에서 방사성동위원소 연구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방사성동위원소 연구는 동물실험이 기본이었는데 식품보약화실인 제2실에서 흰쥐(라떼)와 흰생쥐(마우스), 모르모트를 연구용으로 지급했습니다. 전철영 박사는 저와 다른 부서였지만 연구과정에서 협조가 필요해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녹조류 연구를 맡았던 저는 건강식품을 먹여 키운 실험동물들에 방사성동위원소를 부착시켜 사육기간과 투여시간에 따른 대사물질의 이동과 흡수, 배설 등의 변화와 그 과정을 분석해 방사성동위원소 연구원이었던 전철영 박사에게 인계했습니다.

북한은 다른 나라들에서 활발히 연구되던 해조류를 이용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 식품을 연구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해조류에는 인간의 건강장수에 뛰어난 효과를 지닌 미네랄과 비타민 성분이 다른 식물들에 비해 상당히 높았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이러한 해조류에서 염분을 제거한 녹조분말을 생산하여 동물사료에 첨가하는 방법으로 건강장수 식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첫 연구 성과는 운곡목장 6직장에서 검은 다리 토종닭을 이용해 제가 직접 생산한 녹조계란이었습니다.

그때 유명했던 일본의 셀렌달걀과 중국 요오드계란, 웽그리아의 고추달걀과 비교해도 운곡목장에서 생산한 녹조계란은 절대로 짝지지(뒤지지) 않았습니다. 해조류를 연구하던 저는 녹조분말에서 β-카로티노이드를 추출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β-카로티노이드에 방사성동위원소를 첨가하여 실험동물들에게 먹이고 먹이량에 따른 생체기관의 시간별 흡수상태를 조사하였고 물질대사 이동과정도 관찰했습니다. 이런 연구는 모두 전철영 박사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됐습니다.

만수무강연구소는 자신이 맡은 연구 과제를 다른 부서 연구원들에게 발설하면 엄벌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문으로 하던 해조류 녹조분말 연구와 같이 다른 부서 인원들과 공동으로 진행해야 할 연구과제도 많았습니다.

다른 부서와 공동연구를 할 때에도 연구대상과 관련한 내용 외에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은 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깊이 파악하면서 자신의 가족사나 고충을 상대에게 털어놓고 위로받으려는 인간의 본능은 절대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방사성동위원소 연구를 담당한 전철영 박사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날 때면 50대 초반인데 전철영 박사에게 왜 건강이 그토록 악화됐는지, 만청산연구원에 배치되기 전까지 어디서 무슨 연구를 했는지 조용히 묻기도 했습니다.

그는 만청산연구원에 소환되어 오기 전까지 평안북도의 연구시설에서 일했다는 간단한 얘기만 할 뿐 좀처럼 속내를 털어 놓지 않았습니다. "소환되어 오기 전에 당에 비밀엄수에 대한 서약을 했다"며 늘 질문을 피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철영 박사와 저는 연구원을 떠나 운곡목장으로 현장 실험을 하게 될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위의 감시가 느슨해 진 틈을 타 전철영 박사와 저는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철영 박사는 자신이 평안북도 영변핵물리연구소에서 핵무기와 관련된 연구를 해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북한이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된 1990년대 초부터 핵무기 연구를 시작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의 설명은 전혀 달랐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절대로 핵을 보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1980년대 중반부터 비밀리에 영변핵물리연구소에서 핵무기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기술이 대단히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자신과 함께 일하던 연구소의 많은 과학자들이 이빨이 빠지는가 하면 피부암으로 고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나마 과학자들은 좀 나은 편이라며 연구소 경비를 서는 군인들은 방사선에 노출돼 살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북한의 영변핵물리연구소의 실험실들에는 생맥주가 들어있는 탱크가 있는데 매 연구원들이 자리에 앉아서 어느 때든 생맥주를 마실 수 있도록 맥주탱크에서부터 책상까지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다고 그는 설명해 주었습니다.

몸속에 흡수된 방사성 물질을 빨리 배출하라고 김정일이 특별 배려로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맥주가 체내에 흡수된 방사선 독소를 해소해 준다는 말은 그때 전철영 박사를 통해 처음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나마 과학자들에게는 방사선 검출기와 연막 작업복이 지급돼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나은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주변 경비를 맡은 군인들은 방사선을 막아줄 아무런 조치도 없어 입대한지 3년을 넘기지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쓰러진 병사들은 주변에 있는 방사선의료연구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지만 살아서 다시 돌아오는 병사들은 못 보았다며 그들은 방사선에 노출돼 온갖 고통을 다 겪다가 서서히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전철영 박사는 씁쓸한 웃음을 남겼습니다.

그는 만청산연구원에 배치된지 1년도 채 안 돼 건강이 악화돼 노동당 중앙위 과장급 이상들만 갈수 있는 경성요양소에서 자주 치료를 받았습니다. 출근을 제대로 못하다 나니 제가 만청산연구원에서 해임될 때에도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전철영 박사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 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50대에 이빨이 다 빠져 틀니를 해야 했고 70대 노인처럼 허리가 구부정했던 핵물리학자, 저는 방사선에 피폭된 전철영 박사가 몇 년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들릴 때마다 영변핵물리연구소의 참상을 들려주며 씁쓸한 웃음을 짓던 전철영 박사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철없는 김정은의 핵실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전철영 박사와 같은 과학자들, 주변 경비를 서던 군인들이 죽음을 당했는가를 생각하면 북한이라는 땅이 저주스럽기만 합니다.

만청산연구원에서 전철영 박사로부터 영변핵물리연구소의 끔찍한 진실을 전해들은 사람은 그와 제일 가까웠던 제가 유일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북한이 영변핵물리연구소에서 저지르고 있는 잔인한 참상은 우리 조국이 통일되는 날 반드시 드러나 역사의 심판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