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무상치료제를 선전하는 북한에 살면서 병이 나면 비싼 진료비와 약값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숨지는 친구나 가족들을 안타깝게 지켜볼 때가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과 달리 북한의 고위간부들은 최신식 설비를 갖춘 봉화진료소와 남산진료소에서 외국산 약들을 무상으로 제공받으며 무상치료제의 혜택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간부들에게는 무상치료, 서민들에게는 유상치료를 실시하는 북한엔 각 도마다 의학대학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김일성 종합대학의 부속대학인 평양의학대학이 가장 인기가 높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부 실험생물학과 생리학 전공 반 재학기간에 2주동안 해부학실습을 하였던 평양의학대학 인체해부표본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부 실험생물학과의 생리학 전공 반은 의학과학의 기초과학으로서 대학 4학년 때에 인체해부실습을 하게 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가까운 지하전철역인 삼흥 역에서 한 정류장가면 전승 역인데 여기서 전우 역으로 환승하면 승리 역의 4번째 정류장인 봉화 역에 내리게 됩니다.
그곳에 평양의학대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평양시 중구역 동흥동 해방산 거리에 위치한 평양의학대학(平壤醫學大學, Pyongyang Medical College)은 북한에서 최고의 의학교육기관이며 임상의학연구소와 기초의학연구소, 유전의학연구소, 박사원을 가진 의학연구기관입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이 1946년 10월 1일에 설립될 당시 의학부가 있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평양의학대학의 모체입니다. 당시 의학부에는 의학과와 약학과, 치의학과가 있었습니다. 1948년 9월에는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분리되어 평양의학대학으로 독립하였습니다.
1979년에 평양의학대학과 평양의학대학병원이 통합되어 의학교육과 치료, 연구기관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2010년 5월에 평양의학대학은 다시 김일성 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대학에는 임상의학부와 기초의학부, 고려의학부, 위생학부, 구강학부, 약학부가 있으며 빙 둘러 막힌 듯이 설계된 건물의 중심에 문화회관 모양으로 덩치가 큰 2층짜리 인체표본실 청사가 있습니다.
이 건물 오른쪽에는 1902년에 평양에 지은 행궁인 풍경 궁(豊慶宮)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김정은의 별장처럼 고종이 서울에서 평양에 와서 지낼 행 궁으로 지었는데 궁 안에는 정전(正殿)인 태극전(太極殿)과 편전(便殿)인 지덕전(至德殿), 동궁(東宮)전인 중화전(重華殿), 그리고 정문인 황건문(皇建門)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시기에는 자혜의원(慈惠醫院) 건물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 평안도 도립병원으로, 본 궁은 병실(병동사-病棟舍)로 이용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폐허로 변한 고종의 평양 행궁,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은 팔려서 1930년경에 서울 남산으로 옮겨졌는데 1970년대까지 한국의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에 부족한 의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한국에도 의학기술을 배워주는 교육기관을 내왔습니다. 그때 개설된 것이 서울과 평양, 대구의 의학강습소였는데 훗날 전문학교로 개설하였습니다.
평양의학전문학교는 1929년 4월에 세워진 4년제 전문학교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약 2 대 1의 수준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유지됐습니다. 오늘날의 평양의학대학은 2010년부터 김일성 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되면서 더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인체해부표본실 건물 1층에는 해부학실습실들과 표본저장실이 있습니다. 표본저장실에는 2개의 큰 대형탱크가 있는데 탱크의 모양은 가마(솥)처럼 생겼고 크기는 성인사람의 키를 넘을 만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탱크 안에는 갈색의 뿌연 포르말린 용액이 담겨 있고 그 안에는 어린아이들과 성인들의 시신들이 있습니다. 2층에는 면적이 2백여평 정도의 인체표본실이 있습니다. 2주간의 실습기간 첫 주에는 인체표본실에서 실습을 하게 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부 실험생물학과 생리학 전공 반은 1년에 보통 10명 내외의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제가 다닐 때에는 졸업생이 9명이었습니다. 생리학전공반의 학과목은 일반생리학, 인체해부학, 신경생리학, 내분비생리학, 병태생리학, 면역생리학, 소화생리학 등이었습니다.
해부학실습은 대학 생리학강좌 교수가 인솔하여 평양의학대학에 가서 해부학강좌교수가 진행하였습니다. 첫날부터 일주일간은 인체표본실에서 진열된 표본들을 하나하나 설명을 듣는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방의 정면 벽 가운데에 양쪽으로 2개의 긴 유리관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뼈만 남은 해골들이 마치 서 있는 것처럼 세워져 있습니다. 교수는 '이 해골은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실한 두 남녀 애국자가 조국의 의학과학발전에 자신을 써달라고 하여 그들의 유언에 따라 전시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교수가 자세히 볼 것을 요구하여 들여다보니 드리워진 팔과 손가락뼈들은 가는 구리 선으로 연결시켜 놓았고 겉으로는 에나멜을 칠한 것처럼 반들반들하였습니다. 양쪽 벽을 따라, 그리고 표본실 가운데공간을 따라 길게 탁자들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크고 작은 둥근 표본 병들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 병 속에는 나이별, 성별, 부위별로 잘라서 포르말린 용액에 넣은 사람의 조직과 기관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심장이나 간, 지어 생식기들도 태아기부터 성인이 된 상태의 것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데 단면도를 보여주기 위해 잘라진 면은 예리한 절단기계로 잘리었는지 매끈하였습니다.
두개골도 절반으로 잘라져서 단면 관찰이 용이하였습니다. 해부학 교수가 '여기에 있는 표본은 2백여명의 사체를 해부표본 제작을 위한 정밀기계로 절단하여 포르말린 용액에 보존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폐는 남자의 것과 여자의 것은 색깔이 너무 차이가 심했습니다. 여성의 폐는 두부처럼 흰색인데 비해 남자의 것은 무연탄에 한번 묻혔다가 난 것처럼 검게 얼룩져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북한에서도 담배를 배우지 않은 이유가 남녀의 폐를 대조해보면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첫 실습을 하는 날 기숙사 식당에서 싸준 점심벤또(도시락)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사는 외박 생들도 집에서 점심을 가져와서 함께 먹는데 그들도 차마 사체, 그것도 동강난 시신조각들을 보고는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중앙당 총무부 김인걸 부부장의 딸인 동창생 김수경의 집에 가서 술 한 잔씩 마시고 밥을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해부실습은 1층의 표본보관탱크에 있는 사체들을 갈고리로 걸어, 건져서 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체를 정밀 해부했습니다.
한구의 시체를 메스(해부칼)와 겸자(집게), 핀센트 등을 이용하여 해부 판에 놓고 정밀 해부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는데 어린이 사체는 병원의 산부인과들에서 제공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른들의 사체는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한 친구가 교수에게 물어봤는데 교수는 '학생들은 제시간에 맞춰서 실습을 잘하면 그만이니 그런 것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정치범수용소 죄수들이나 간첩들이 이런 실습대상이 될 거라고 얘기했다가 다음날 학부담당 보위 원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체들, 졸업생들에게 해마다 제공되는 사체들 앞에 지금은 죄를 지은 심정입니다. 북한 당국은 이런 기술을 배운 졸업생들을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연구하는 만수무강연구소나 고위층 간부들을 치료하는 봉화진료소, 남산진료소에 배치했습니다.
지금은 해부표본인양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체도 유리관에 보관되어 뭇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왜 조상들의 사체를 유리관 속에 넣어 구경거리로 만들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을 굶겨 죽이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체까지 도륙 당해야 하는 북한 주민의 처참한 현실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리관 안 사체에서 떠올리는 것은 비단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0:00 / 0:00